[기고] 문예창작동아리 창문

이건 무슨 상황인가. 잠에서 깨 보니 맞은 편 여자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도서관 로맨스인가 싶어 여자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민둥민둥한 얼굴 위의 오뚝한 코가 논밭 위 송전탑마냥 비정상적으로 솟았다. 꽤나 있는 집 자식인가 보다. 저 몇 센티를 높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사임당들이 수고를 해주셨을지.

시선을 내리니 새빨간, 아니 시뻘건 입술이 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생크림 케이크 위의 딸기.......보다는 덜 씻은 방울토마토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여자의 입술이 다가왔다. 이건 드라마에서도 못 본 전개인데. 질끈, 눈을 감았다 뜨니 방울토마토가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있었다. 뻐끔뻐끔. 여자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는 듯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예? 하고 어벙한 대꾸를 하자 잠결에 마비되어 있던 청각이 다시금 돌아왔다. 마른침을 삼키고 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작은 입으로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코 좀 그만 고시라고요. 시끄러우니까.”

 

퀴퀴한 악취가 났다. 입에 향수라도 뿌릴 것이지. 짜증나는 년.

삼십 분 쯤 잔건가. 환기라고는 안 해서 답답한 공기에 뜨뜻한 온도라니, 잠들기 딱 좋다. 흰 스크린에 커서가 깜빡거린다. 쓰라는 논문은 안 쓰고 뭐하는 거냐며 끔뻑, 끔뻑. 그래도 제목은 썼잖아, 라는 변명을 둘러대며 인터넷을 뒤적거린다. 이따위 논문, 금방 끝내버리고 치울 수준밖엔 되지 않는다.

 

.......필자는 과연 이번 사태가 단순히 한전 측의 잘못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인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국가의 기반시설이라 할 수 있는 도로, 항만, 전기 등의 시설은 그 광범위한 필요성으로 인해 반드시 설치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특정 지역의 희생이 따를 수 있다. 쓰레기 매립장, 원전 시설, 방사능폐기장 등 기피시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현대국가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번 밀양 사태를 지역이기주의 및 과도한 피해의식에서 기인한 개인의 극단적 행동양상의 측면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님비와 잠재적 피해의식에 관한 기존의 사회학적·심리학적 연구는 많지만 이를 국내 사례에 접목한 연구는 희소하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고, 박 교수가 그랬다. 담배 한 대만 피고 와야겠다. 젠장.

 

후, 하고 뿜는 연기 너머로 상아탑이 사라졌다 나타난다.

개교 이래 누구도 해결 못한 자금난을 한 번에 날려버린 모 기업은 학교와 ‘긍정적 협력관계’를 맺은 후 중앙광장 정 가운데에 저것을 박아버렸다. 건물의 공식이름이 ‘랜드마크 빌딩’이었으니 그야말로 랜드마크가 생긴 셈이었다. 하지만 총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저것을 랜드마크라 부르지 않았다. 흰색도, 갈색도, 그렇다고 회색도 아닌 애매한 도색이며 조잡한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사각뿔 모양을 한 저것에 상아탑보다 적당한 이름은 없었다.

적선 받은 상아탑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기업을 욕하고 고시를 준비하고 연애사업을 한탄하고 입사지원서를 쓰고 디저트를 먹고 학과가 없어져버린 친구를 위로하고 잠을 자고 꿈을 꿨다. 한 때는 그런 허황한 꿈도 꾸었다. 하고 싶은 공부 다 하면서 밥도 잘 챙겨먹고 가끔은 연애도 하는 그런 대학생의 모습을. 따르릉. 따르릉. 하지만 이젠 정말 꿈을 깰 시간인 것이다.

 

-어, 김 군. 지금 바쁜가?

-아닙니다. 교수님.

-그래. 어떻게, 논문은 잘 돼가나?

-예, 뭐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면 안 되지! 또 저번처럼 썼다가는 내가 책임지고 자네 환갑까지 박사과정으로 남게 해줄 거야! 자네가 골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쓰고 넣어둘 글이면 몰라도, 우리 대학 정도의 학위논문이면 한 두 명이 보는 게 아니란 말일세. 좀 현실을 보고 글을 쓰라고.

-네, 잘 알겠습니다.

-지금쯤이면 적어도 절반은 썼겠지? 내일 한 번 만나서 같이 보세.

-예.

-끊겠네.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피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의 날씨는, 어디 보자. 구름 없음. 날씨 맑음. 기분 저기압. 월세 전선 북상 중. 도서관으로 대피 요망.

 

 

-위이잉!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휴대폰이 산통을 깬다. 무음모드를 깜빡한 건가. 맞은 편 여자가 어김없이 눈을 부라린다. 언제 화장을 고쳤는지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저기요, 도서관에서는

-아, 네 죄송합니다.

 

양치라도 하고 난 다음에 쏘아붙여라, 제발.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밖으로 나서는데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박 교수의 문자였다. ‘내일 저녁에 상아탑 4층에서 보세나.’ 오늘은 꼼짝없이 밤을 새야 될 모양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부담을 앞에 두고 그 어떤 희생도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은 낭만적인 공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현지 주민들의 과도한 반대 반응은 더욱 흥미로운 현상으로 다가온다.

 

새벽 3시 48분. 아, 나는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내일의 나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머리와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다. 뿌듯한가? 뿌듯하다기보다는 불어터진 짜장면을 배터지도록 우겨넣은 기분으로 도서관을 나선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올려다본 서울 밤하늘엔 얼씨구나, 달이 휘영청 떴다.

달빛을 먹은 새벽 네 시의 상아탑은 더욱 기괴해보였다. 가뜩이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치솟은 상아탑은 스산한 달빛을 휘감은 채 마법이라 해도 믿을 만큼 영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사실 상아탑 꼭대기엔 늑대인간이라도 살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평소에는 사람이다가 오늘 같이 보름달 뜨는 날이면 괴물로 변하는 늑대인간 말이다. 교회나 무당 이야기를 들으면 코웃음부터 쳤던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정말 늑대인간이 있어주길, 아니 상아탑의 마법이 진짜이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인간을 괴물로 바꿀 수 있다면 사람 아닌 것도 사람으로 바꿀 수 있을 터였다.

젊은 청춘도, 감각 있는 현실주의자도 아닌 나 같은 놈도 새벽 네 시 상아탑 앞에서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기 상아탑 벽에 기대어 슬픔을 토하는 익숙한 저 여자도.

여자는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선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여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마스카라가 다 번졌다. 이.......이........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여자는 다시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에엑. 나는 여자의 등을 두드려주며 문득 박 교수와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주 냄새가 물씬 끼쳤다. 후우, 후우, 두 번의 심호흡 끝에 여자가 말을 꺼냈다.

 

“이름이 뭐에요?”

 

그 날 새벽 네 시, 상아탑 앞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더랬다.

 

 

창문 김제훈(국어국문학과·15)

 

작품 설명: 일상의 삶에 치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헷갈리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몰개성의 상징인 상아탑 아래서 주인공이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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