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명호 교수(국사학과)

한국사교과서 국정화가 찬반 격론 속에 강행되고 있다. 그 논란의 진앙에서는 현대사의 중요 사실들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이 충돌하며, 이들은 각각 두 계열의 정치 진영과 연결돼 있다. 지금의 교과서 편찬 문제를 볼 때, 600년 전 일이지만 역사 편찬에서의 갈등을 넓게 멀리 보며 풀어간 세종대왕의 고뇌와 지혜가 새삼 가깝게 다가온다.

조선이 건국된 해, 당시로서는 지금의 ‘현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포함한, 고려왕조의 역사 편찬이 정도전 등에 의해 시작됐다. 자연히 정파별 노선과 직결된 역사 인식의 차이가 노출되며, 갈등이 고조됐다.

여러 문제 가운데 끝까지 큰 논란이 된 것은 고려왕조가 수백 년간 시행했던 황제제도의 서술 문제였다. 주자학적 정치이념과 사대이념을 추구한 정도전은 『고려국사』에서 고려 황제제도를 참람(僭濫)하다고 비판하며 제후제도로 바꿔 서술-개서(改書)-했다.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꼬투리를 잡아 위협하며, 조선에 제후국 형식을 강요한 명나라와의 시비 거리를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세종 원년에 그 책의 개찬을 맡은 변계량은 사대이념에 더 투철해, 정도전도 개서하지 않은 일부 사건까지 모두 제후제도로 개서했다. 역사적 사실이 더욱 손상됐으니, 일부 사관(史官)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고려왕조실록 등 방대한 자료들을 확보하고서도, 개서에 의한 고려 역사는 개찬을 해도 빈약한 내용을 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려 황제제도의 수많은 관제·문서식·의례 등은 여러 차례 변동됐는데, 그것들을 바탕이 다른 제후제도에 따라 바꿔 역사서의 기사로 집어넣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변계량 등과 세종 사이에 격렬한 논쟁과 갈등이 시작됐다.

세종도 사대이념이나 명나라에 대한 우려를 큰 틀에서는 인정했지만, 역사는 사실대로 서술-직서(直書)-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 왜곡과 빈약한 내용을 모두 해결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이념에 쏠려 중요 사실을 무시·축소하거나 왜곡하는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세종은 문제의 핵심을 직시해, 부서지고 일그러진 역사의 본체를 살릴 방향을 찾은 것이다.

세종의 지혜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직서를 실현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것은 일부 양보하고, 여건을 조성하며 필요한 때에 기다려 주는 등, 여러 고비마다 현명한 결단을 내렸다.

대명관계의 민감성을 고려해, 고려 임금의 ‘황제’ ‘천자’ 위호, 고려의 ‘천하’ 등은 제외하고 황제제도의 나머지 많은 용어들과 관련 사실들만을 직서하도록 양보했다. 그러함에도 왕명을 받고 『고려국사』를 직서로 개찬한 윤회는 그 서문에서 직서는 세종의 ‘독단’이라고 천명했다. 그것을 계기로 변계량 등은 또다시 완강하게 직서에 반대했다. 세종은 여기서도 양보해 그 책의 반포나 다른 작업을 모두 멈추고 7년을 기다렸다. 그사이에 국왕권으로도 바꾸기 어렵던 조정의 분위기가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인 직서 원칙에 호응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윤회가 마지못해 직서로 개찬한 역사서는 내용도 빈약했다. 세종은 내용이 풍부한 역사서를 만들기 위해 자료 수집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고 오래도록 지원하고 기다렸다. 그렇게 편찬된 『고려사전문』의 일부 인물에 대한 서술에서 사적인 불공정 행위가 발견되자 반포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미 재위 만년이었지만, 보완을 거듭하고 역사 편찬의 체제를 재검토해 바꾸게 함으로써 내용이 몇 배로 풍부해진 『고려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사교과서의 편찬에서 두 계열 정치 진영과도 연결된 현대사에 대한 상충하는 관점과 이해들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어려운 문제다. 국정교과서에서는 해결을 기대하기 더욱 어렵다. 여러 해가 걸리더라도 설득력 있는 문제의 핵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기간에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문제가 아니므로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미래의 주인공들의 한국사 인식에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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