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연 석박사통합과정(기계항공공학부)

‘캣맘’, 길고양이를 돌봐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길고양이는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일까. 캣맘들이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과 갈등을 빚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난해, 고양이를 돌봐주던 여자가 벽돌에 맞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어떤 아이의 철없는 장난이었음이 밝혀졌지만, 그사이 인터넷 여론은 캣맘에 대한 혐오로 인해 범죄가 일어났을 것이라 추측하며 캣맘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길고양이를, 길고양이를 돌봐주는 캣맘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일 테다.

캣맘과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싸움이 종종 벌어지지만 그건 동종 간의 문제니까 그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게 두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길고양이가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어쩌면 정당하다.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울어대서 시끄럽다고,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어떤 사람들은 생태계를 교란시킨다고 길고양이를 싫어한다. 극단적인 이들은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이 동물을 적어도 도심에서는 살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겐 호오(好惡)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들에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생존의 문제다. 어떤 존재를 싫어하는 것과 어떤 존재의 ‘생존’까지도 싫어하는 것은 다르다. 옆집 사는 사람이 시끄럽게 굴거나,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거나, 조금 잔인하다면 당연히 싫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옆집에서 사는 것을 저지할 권리는 우리에겐 없다. 그 사람이 그곳에 사는 것이 싫어서 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공격하거나 죽일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법적인 처벌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을 내쫓지 못하거나, 빼앗지 못하거나, 죽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옆집 사람은 그 곳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생존에 위협을 가할 순 없다. 그가 사람에서 동물로 바뀌었다고 그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생존’의 무게는 살아 있는 누구에게나 같다. 그들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생존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조금 뛰어난 지성으로 그들과 나누던 생존공간을 인간만의 것으로 독차지했다. 그게 나쁘거나 잘못되진 않았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생태계에서 강한 놈이 더 많이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세상 전부를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면, 그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보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적어도 ‘살 수 있는’ 한 귀퉁이를 내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적어도 그들의 생존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당신이 선호하는 동물만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 역시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이다. 흔하디 흔한 고양이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엔 인간이 중심인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모든 동물들이 포함된다. 깨끗한 흙을 찾아 나선 지렁이도, 겨울을 피해 날아가다가 내려앉을 곳을 찾는 철새도, 평생 알만 낳다 죽는 양계장의 닭도, 언젠가 먹힐 운명인 농장의 소도, 모두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생존’을 존중해야 한다. 재미로 지렁이를 밟지 말아야 하고, 새들의 유일한 경유지를 무분별하게 파괴하지 말아야 하고, 인간을 위해 이용당하는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최대한의 존중을 표해야 한다. 그 생존을 인간의 편익대로 방해하는 것은, 그 생존에 대한 개입 없이도 인간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기술 발전을 이룬 현재에 와서는 옳지 않다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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