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자연대 세계석학평가

지난 1월 자연과학 분야의 해외 석학 12명이 자연대의 교육, 연구 환경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노벨상, 필즈상 수상자 등으로 구성된 평가단은 자연대의 초청을 받아 지난해 2월부터 11월까지 직접 교수와 학생들을 인터뷰하고 학교 현장을 둘러보며 자연대의 교육, 연구 환경을 조사했다. 20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실시된 이번 평가에서 석학들은 자연대에 대한 종합평가는 물론이고 개별 학부에 맞는 세세한 조언까지 제시했다.

▲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정량 평가로는 ‘추종자’ 이상이 될 수 없다

‘2016 교육·연구역량제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이번 최종보고서에서 나온 자연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교수들에 대한 정량적, 성과 중심적 평가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를 평가하는 방법은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다. 임팩트 팩터란 한 해 동안 전 세계의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논문이 얼마나 많이 인용됐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다. 보통 연구자의 임팩트 팩터는 논문의 수가 많을수록, 투고한 학술지가 영향력 있을수록, 또 논문의 내용 자체가 뛰어날수록 높게 측정된다.

자연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임팩트 팩터를 기초로 교수의 채용, 승진, 지원을 결정한다. A씨(생명과학부·12)는 “실제로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도 임팩트 팩터를 많이 강조하신다”고 말했다. 학계는 논문이라는 결과로 연구자의 역량을 평가하기 때문에, 이처럼 임팩트 팩터를 중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량적인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탓에 몇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는 것이 석학들의 지적이다.

비인기, 미개척 분야의 연구자는 인기 분야 연구자에 비해 임팩트 팩터가 낮을 수밖에 없다. 동일한 수준으로 뛰어난 논문이더라도, 생태학처럼 당장 연구자의 풀이 좁은 분야의 논문과 유전학처럼 많은 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의 논문은 인용 횟수에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연구자들은 지표상으로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 인기 있는 분야에 몰리고, 모험적이고 새로운 연구는 줄어든다. 이번 평가에 참여했던 팀 헌트 영국 암연구소 전(前) 수석연구위원은 “교수들이 평가받는 방식 때문에 젊은 연구자들은 이미 인기 있는 분야로 몰리고 있다”며 “이들은 선구자가 되지 못하고 추종자에 머물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정량적 평가는 교수에게 논문을 많이 작성하도록 종용한다. 논문의 개수가 많을수록 임팩트 팩터가 높아지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장기적인 연구를 해 하나의 논문을 쓰기보다 짧은 연구로 여러 개의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연구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헌트 교수는 “연구자들이 유명한 학술지에 최대한 많은 논문을 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 것 같다”며 “단기적 성과에 대한 요구를 줄이고 연구자를 더 믿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량적 평가를 축소시키고, 정성적 평가를 도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B씨(생명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11)는 “학계에서 논문이 아닌 다른 요소로 평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된다”며 “단순히 숫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논문의 내용을 본다 해도 오히려 주관성이 개입돼 위험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해외 명문 대학에서도 교수에 대한 정성적인 평가를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자연대 이현숙 기획부학장(생명과학부)은 “헌트 교수 스스로도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며 “하지만 생각과 철학을 분명히 하고 한 날개에서는 성과가 뛰어난 연구를, 또 한 날개에서는 모험적이며 원천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양 날개의 형태를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진 연구 인력의 유출을 막아라

교수에 대한 평가 방식만큼이나 중요하게 거론된 문제는 박사 후 과정(postdoctor, 포닥) 연구자에 대한 열악한 지원과 그에 따른 우수 인력의 유출이다. 포닥은 대학 연구 역량의 핵심적인 존재다. 교육 과정을 마치고 고용된 숙련 연구자인 포닥은 이제 막 연구를 배우기 시작한 대학원생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헌트 교수는 “세계적인 해외 대학들에서는 포닥에 의해 연구가 주도된다”며 “하지만 서울대 자연대는 대학원생들의 수가 현저히 많고 포닥의 숫자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석학들은 포닥의 경력 개발을 위한 지원이 열악하기 때문에 많은 포닥이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현재 포닥의 경력 개발에 대한 자연대의 지원은 전무하다. 리타 콜웰 교수(미국 메릴랜드대 생물학과)는 “포닥을 단순한 직원으로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대학, 기업, 정부에서 포닥의 역량과 경력을 개발하기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연대는 포닥의 경력 개발을 돕는 자유로운 연구 환경을 만들어 해외로의 인력 유출을 막겠다는 입장이다. 이현숙 기획부학장은 “포닥들이 자신이 어떤 경력을 쌓은, 어떤 연구자인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펠로우쉽과 수상의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감한다”며 “펠로우쉽 과정을 수행하며 연구실, 학과, 또는 대학을 오가며 자유롭게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평가에서 포닥의 재정 지원에 대한 문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지만, 당사자인 젊은 연구자들은 경력 개발 문제뿐만 아니라 재정적 지원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C씨(자연대 박사과정 수료)는 “포닥의 수입원은 매우 가변적이고 불안하다”며 “많은 경우 포닥의 임금은 연구실이 정부 등으로부터 따오는 연구비로 충당되기 때문에 속한 연구실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액수가 달라질 수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외에도 학부별로 인원을 정해두고 교수를 채용하는 경직된 채용 시스템, 교수들이 자신과 비슷한 연구를 하는 ‘복사판’을 후임으로 채용하고 은퇴하는 풍조, 테뉴어를 보장받은 교수들의 연구 성과가 저조한 점 등이 지적됐다.

 

평가에 그치지 말고 구체적 실천으로

한편 이러한 평가가 실제 변화로 이어질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역시 크다. 박준규 씨(물리천문학부·13)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접한 게 처음이 아닌데, 매번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며 “조사 이후에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평가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견에 이현숙 교수는 “평가를 바탕으로 실제 변화를 구현하기 위해 TF팀을 꾸리고 있다”며 “해외 석학들이 지적한 문제를 우리 대학 환경에 맞게 어떻게 구현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변화의 과정에서 자연대 내 다양한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충실히 반영될지도 지켜볼 문제다. 자연대에서 준비 중인 TF팀도 자연대 교수들로만 구성될 예정으로 알려져 학부생, 대학원생, 포닥 등 교수 이외 구성원의 의견을 어떻게 반영할지는 미지수다. A씨는 “매번 이런 논의에서 학부생, 대학원생은 중요한 주체로 취급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우리 역시 자연대 교육, 연구 환경의 당사자”라고 지적했다. 포닥 지원 문제에 대해 이현숙 교수는 “포닥의 의견을 수렴하는 통로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지속적으로 교수들 밑에서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대학원생이나 포닥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직접 교수들에게 연구 환경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형식적인 통로를 넘어선 구체적인 방안이 도출돼야만 유의미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번 세계석학평가는 변화를 위해 대내외적으로 자연대의 민낯을 공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현숙 기획부학장은 “쓴소리를 듣기 위해 실시한 평가”라며 “외부의 눈으로 본 문제점을 듣고자 가감 없이 정보를 공개했다”고 밝혔다. 해외의 유수 연구소와 대학의 경우 이 같은 정성적 방문 평가를 관례적으로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를 시도한 것은 2005년 자연대가 처음이었다. 또 첫 평가 이후 이번에 다시 한 번 평가를 진행하면서 지속적으로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평가가 가시적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선 다양한 구성원의 의견 수렴과 행동이 필요하다. 앞으로 자연대가 장애물을 넘어 세계적 수준의 연구대학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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