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트렁크 갤러리 '김혜순-브릿지'전

문학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녹아든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 만남을 이어준 다리는 바로 여성주의 시인 김혜순이다. 최근 국내에 11번째 시집 『피어라, 돼지』가 나왔고 미국과 프랑스에도 작품이 번역 출간된 김 시인의 시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여성 미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이에 김 시인과 교류를 이어온 예술가들이 시 낭독회와 함께 시인에 관한 전시회 ‘김혜순-브릿지’를 종로구 ‘트렁크 갤러리’에서 연다.

김혜순 시인과 여성 미술가들의 인연은 깊고 오래다. 최초의 만남은 1988년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의 중요한 작업으로 자리매김한 전시회 ‘우리 봇물을 트자’였다. ‘여성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이라는 부제로 정정엽, 박영숙 등 1세대 여성주의 작가들이 김혜순, 고정희 등 10여 명의 여성 시인의 시를 주제로 시화를 그려 전시했다. 정정엽 작가는 “당시 여성을 다룬 그림은 남성의 관점에서 묘사된 성녀 혹은 누드뿐이었고 여성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있었다”며 “반면 김혜순의 시는 매우 회화적이면서 여성의 깊은 내면을 담고 있어 작업에 큰 영감을 줬다”고 설명했다.

이후 김 시인의 시와 여성주의 미술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밀히 연대해왔으며 그것이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도 이어진 결과가 이번 전시다. 전시엔 1세대 여성주의 작가들 외에도 김정욱, 방정아 등 중견 작가들과 김미루, 이피 등 청년 작가들까지 참여했다. 작업의 장르도 다양하고 제작연도는 1992년부터 2016년까지 걸쳐있다. 정 작가는 “작가들은 모두 김혜순 시에 나타나는 여성성이나 시대의 아픔에 공감한 애독자들”이라며 “시의 상상력이 동시대 여성 작가들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평가했다.

▲ 사진➀ 윤석남, Pet H.S Kim 김혜순, 47X14X138cm
▲ 사진➁ 정정엽, 당신의 첫, 162X130cm

 

 

 

 

 

 

 

 

 

 

 

김 시인의 오래된 애독자들은 자신에게 풍부한 영감과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준 시인에 대한 존경을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쇼윈도에 전시된 윤석남 작가의 ‘Poet H.S Kim 김혜순’(그림➀)은 못이 수없이 박힌 심장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시인을 목판 위에 그렸다. 구제역 파동 때 살처분된 돼지들의 아픔에 감응한 시를 썼듯, 약한 존재들의 통증을 자신의 것처럼 예민하게 느끼는 김 시인의 감수성이 형상화된 것이다. 정정엽 작가의 ‘당신의 첫’(그림➁)은 시인의 초상을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다. 시인의 얼굴엔 새빨간 꽃이 피어오르고 해골과 힌두여신상 등 작은 도상들이 꽃 사이사이 들어있다. 정정엽 작가는 “김혜순 시는 언제나 세상을 볼 때 마치 처음 보듯이 바라보게 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며 “그가 나에게 준 상상력을 초상 속에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 사진➂ 김미루, NY1, 1001X152cm

김혜순의 자유로운 시 세계처럼 여성 미술가들도 가부장제 비판이나 여권 해방 등에 갇히지 않고 여성의 시각으로 본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김미루의 사진 ‘NY 1’(그림➂)은 시집 『피어라, 돼지』를 연상케 한다. 사진 속 여성과 돼지의 살이 맞닿는 모습은 돼지와 인간의 유사성과 친밀함을 드러내고, 이는 학대당하는 돼지와 약자들을 동일시한 시인의 관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정정엽 작가의 ‘고군분투’는 문명의 발전 속에서 분열된 스스로의 초상을 그렸다. 정정엽 작가는 “자기 분열을 인식하는 치열함과 나 자신을 해체할 수 있는 상상력을 시인에게 배웠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김혜순을 통해 세상과 조우하고 상상력을 발휘한 작업들의 성찬이다.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 최선미 씨는 “여성주의라는 뚜렷한 경계를 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작가들을 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따뜻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소감을 말했다. ‘여성 시인들의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크고 너른 김혜순의 시 세계와 여성주의 미술의 다양한 매력을 동시에 만나러 봄나들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일시: 27일(일)까지 장소: 종로구 소격동 트렁크갤러리 입장료: 무료 문의: 02-3210-1233)

 

사진제공: 트렁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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