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 편] 그래픽노블 『폴리나』 리뷰

▲ 「월간 그래픽노블」 박성표 편집장

“춤은 예술이다.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지.”

폴리나 울리노프는 6살 어린 나이에 오디션에 합격해 보진스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보진스키 선생은 큰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말투는 단정적이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무섭기로 정평이 나있다. 고학년 진학을 앞둔 학생들 앞에서 보진스키 선생이 말한다. 춤은 오직 타고나야 하고, 동시에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이 말은 아무리 연습해도 타고나지 않고서는 일류 댄서가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춤을 배우러 온 아이들에게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예술관이기 때문이다. 관점은 평생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형성된다. 이제 춤의 기본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어떤 관점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재능을 타고난 폴리나는 보진스키에게 개인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폴리나는 엄격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발레 동작을 멋지게 소화하는 것 이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폴리나는 러시아 발레단에 발탁되지만, 발레단의 연습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발레단에서는 보진스키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을 깡그리 잊고, 내면의 충만한 호기심을 춤으로 표현할 것을 주문한다.

한편 폴리나는 발레단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보진스키 선생의 제안에 따라 솔로 공연을 준비한다. 상반되는 요구 속에 폴리나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결국 폴리나는 발레단과 보진스키 모두를 뒤로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고, 부상과 첫사랑의 실패 속에서도 연극과 춤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눈을 뜨며 마침내 댄서로 대성하게 된다.

▲ 『폴리나』 / 바스티앙 비베스/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6쪽

중앙도서관 단행본자료실

741.5944 V837p 2011

『폴리나』는 발레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예술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6살 엄마 손에 이끌려 오디션을 보러 갔던 작은 꼬마 폴리나는 춤이 어렵기만 하다. 수업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선생님들은 어린 학생에게 열린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확립한 예술관을 가르칠 뿐이다. 이해하든지, 의문 없이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학생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가르침이라고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폴리나는 아카데미와 발레단, 그리고 우연히 만난 연극단과의 협업 등 계속해서 새로운 무대를 만나면서 해결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자기도 모르게 춤으로 발현되는 것을 느낀다. 이해하지 못했던 가르침들이 몸과 마음속에 마치 씨앗처럼 남아있다가 다양한 경험과 훈련이 쌓이면서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기존의 형식과는 다르지만, 연극을 춤으로 표현하면서 폴리나는 비로소 자신이 왜 춤을 추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옛 남자친구가 실없이 던진 보진스키 선생이 죽었다는 농담에 분노하는 자신을 보며, 그 모든 시작점이 보진스키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폴리나는 보진스키와 솔로를 준비하면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토록 엄격하고 “날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라”고 했던 보진스키 선생님이 진정으로 자기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솔로를 그만두고 선생님을 떠나는 데 대한 죄책감이 따라 다녔다.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보진스키에게 폴리나는 발레 공연을 하기 위한 또 한 명의 댄서가 아니다. 재능을 타고난 아이가 제대로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보진스키의 말처럼 예술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진정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를 알아보고 그것을 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니까.

엄격한 선생님이라고 하면 영화 「위플래쉬」를 떠올리겠지만, 그는 학생을 도구로 사용하는 사이코패스일 뿐이다. 보진스키가 딱 한 번 안경을 벗고 폴리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눈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자신이 폴리나의 춤과 인생을 망쳐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프랑스의 젊은 거장 바스티앙 비베스(1984년생)는 『폴리나』에서 흘려 그린 듯한, 얼핏 보면 스케치 같은 그림체를 선보인다. 그의 선은 딱딱 떨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간다. 마치 붓으로 두텁게 칠한 것처럼 그림에 명암을 주고, 복잡한 배경을 배제해서 그림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칸과 칸을 나눌 때도 직선이 아니라 손으로 선을 그렸다. 그래서 페이지 전체가 위화감 없이 폴리나가 펼치는 춤의 세계를 보여준다.

발레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발레를 잘 몰라도 작품을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다. 정지된 그림으로 몇 동작을 이어서 보여주는 것만으로 발레의 우아함을 표현한 것은 그래픽노블이라는 형식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비베스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특히 비베스는 학창시절 그래픽아트와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정해진 시간과 프레임 안에서 연속적인 장면을 그리는 애니메이션을 거쳐서, 한 컷 한 컷 정지된 그림을 그리지만, 연속성을 표현하는 그래픽노블로 나아갔다는 것이 흥미롭다. 마치 엄격한 클래식 발레로 시작했지만, 차츰 다양한 영역으로 넓혀가며 지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폴리나처럼 비베스 역시 자신이 거쳐간 영역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비베스는 『폴리나』외에도 『내 눈 안의 너』 『염소의 맛』 등을 통해 남녀 혹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컷과 컷 사이에 표현하고 있다.

비베스는 혹시 폴리나처럼 애니메이션 수업을 들으면서 알 수 없는 가르침에 혼돈을 느꼈을까?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이란 배울 수 없으며, 오직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발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비베스의 대답이 무엇이든 그것은 비베스의 정답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관점을 가지고 작품을 대하고, 예술을 대하고, 인생을 대해야 한다. 다만 관점에 따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폴리나가 관점이 다른 보진스키 선생님의 마음을 깨달았듯, 우리도 자신의 관점을 견지하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픽노블이라는 혹은 만화라는 예술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품이 숨어있던 인간성을 포착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참된 스승과의 관계는 예술의 견해도 초월하듯이, 참된 예술과의 관계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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