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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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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4.03 02:08
  • 수정 2016.04.0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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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주 박사과정(미학과)

이것으로 박사과정 4학기 차가 된 지 한 달이 됐다. 매 학기, 개강을 위해선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는 장학금 신청이고 하나는 등록금 분납 신청이다. 이것들이 관문인 이유는 내게 보호자를 묻기 때문이다. 매 학기 스스로 등록금을 대고 있지만 장학금을 신청할 땐 보호자의 인적 사항을 입력해야 하고(나는 내 이름을 입력한다) 분납을 신청할 땐 보호자 동의 여부를 입력해야 한다. 해서 나는 매 학기 생각한다. 나는 언제쯤 누군가의 피보호자,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나 개인이 될 수 있을까.

서울 지하철 광화문역 한편에는 3년이 넘은 농성장이 있다. 2012년 8월에 시작된 이 농성의 요구안은 단 2가지다.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 현재 한국의 장애인 등록제도는 6단계로 돼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장애인으로 등록해 필요한 복지 지원을 받고자 하면 1급에서 6급까지 등급표를 받아야 한다. 등록을 마치면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에 상관없이 등급별로 제한된 지원을 받게 된다. 그나마도 모두가 받는 것은 아니다. ‘가족’ 중에 노동능력이 있는 이는 나머지 가족들의 부양의무자가 되며, 수급자가 되기 위해선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절연을 해야만 한다.

여기서 나는 또 개인이 없음을 본다. 한 장애인 개인은 6개의 등급으로 분류되고 또 어떤 가족의 성원으로 분류된다. 장애 등급과 가족 유무를 통해, 전 인구의 10%에 달하는 장애인은 단 12가지 유형으로 단순화된다. 서로가 다른 존재인 개인이라는 관념이 끼어들 자리는 여기엔 없다. 장애등급제가 없는 나라들에선 장애인 개개인의 구체적인 장애와 필요를 확인해 이를 토대로 지원을 제공한다. 부양의무제가 없는 나라들에서는 적어도 성인이 된 장애인과 그 가족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를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지원을 제공한다. 등급이나 가족관계 같은 추상적인 범주가 아닌 실제 개개인과 대면하는 것이다.

학생 개개인을 누군가의 자식으로 치환하고 장애인 개개인을 어떤 등급으로 치환하는 이런 일은 일상 곳곳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우리는 종종 성별, 나이, 전공, 국적 등의 범주로 개개인을 환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개개인은 삭제되고 추상적인 범주들만 남는다. 이런 식으로는 서로에 대해 알 수 없다.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친구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없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런 곳에서는 인간 존엄이 사라진다. 이런 곳에선 개인이 쉽사리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돼 버리고,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개인 간의, 혹은 개인에 대한 윤리마저도 금세 사라지고 만다.

미학사(美學史)에서 좋아하는 문장을 하나 꼽으라면, 미학이라는 학문 분과를 처음 제안한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이 『아이스테티카(Aesthetica)』에 쓴 문장을 택하겠다. “추상화(抽象化)가 손실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손실로 옮긴 것의 라틴어 원어 약투라(jactura)는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내다 버리는 것을 뜻한다. 섣부른 추상화는 고이 간직해야 할 것들을 내다 버리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추상화를 포기할 수 없는 철학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늘 이 말을 가슴에 새긴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내 앞의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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