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금서 다시 읽기 - 악마의 시

한 작가가 있다. 그가 쓴 소설은 신성모독을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고, 출판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작가 본인 역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의 앞으로 막대한 액수의 현상금이 걸리고, 그는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세계 각지의 서점이 폭발하거나 일본 번역자가 참살당하는 등 소설과 관련해 테러가 빈발하고, 그를 둘러싸고 두 국가 간의 국교가 끊어지는 충돌까지 빚어진다.

실제 상황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이야기는 인도 출신의 작가 살만 루시디가 1988년 소설 『악마의 시』를 출간하고 겪게 된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란혁명의 최고지도자였던 야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발부한 파트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살만 루시디는 영국 정부의 보호 아래 피신생활을 지속했다.

▲ 악마의 시 上,下/ 살만 루시디/

김진준 옮김/ 문학세계사/

430쪽,383쪽/ 각 12,000원

20세기의 대표적인 문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악마의 시』는 지브릴 파라슈타와 살라딘 참차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선과 악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프랑스 최우수 외국도서상, 휘트브레드상 최우수 소설상, 독일 올해의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하지만 종교적 도발로 여겨질 수 있는 여러 대목으로 인해 이슬람권 일부 국가들에서는 금서로 지정됐다. 종교와 문학, 세상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논란의 불을 계속해서 새롭게 지피며 『악마의 시』는 여전한 스테디셀러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락, 지상에 선 천사와 악마

인도의 인기스타 지브릴 파라슈타와 영국에 거주하는 인도인이자 성우인 살라딘 참차.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소설 『악마의 시』는 나름의 방식으로 인도와 영국을 묘사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인도의 문화와 타락상을 묘사함은 물론, 영국의 소수자 차별과 자본주의의 모순 등을 드러낸다. 인도 출생의 영미문학가라는 작가 본인의 개성을 잘 담아내고 있는데, 제3세계 인도와 서구 열강의 대표적 국가였던 영국이 한 자리에 뒤섞여 각자의 모습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작품의 사회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담고 있는 주제의식 자체도 비교적 무겁다. 비행기 폭탄 테러 이후, 두 주인공은 각각 자신을 천사와 악마로 인식하게 된다. 지브릴이 천사로, 살라딘이 악마로 그려지지만 둘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불과하다. 천사로 묘사된 지브릴은 여전히 여색을 밝힌다거나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도 크게 분노하는 등 선으로 규정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여준다.

악마로 그려지는 살라딘의 악행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박한 것으로 그려진다. 살라딘의 악행은 모두 지브릴을 향해 있는데, 이는 악마의 행위라기보다는 질투로 인한 소심한 복수에 가깝다. 천사 지브릴과 악마 살라딘은 인간들의 경외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세계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다. 지브릴이 자신을 천사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병으로 치부되며, 살라딘은 외형이 악마와 같이 변하게 되면서 아내로부터도, 친구로부터도, 심지어는 영국 사회 전체로부터도 외면받는다. 『악마의 시』는 천사도 악마도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보여주면서 선악의 구분을 완전히 깨뜨리고, 온전한 천사도 온전한 악마도 없음을 꼬집는다.

이 작품이 이슬람권의 비난을 받게 된 것은 이슬람교 자체를 왜곡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다수 포함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브릴이 꾸는 꿈이다. 꿈속의 대표적 인물인 마훈드(마호메트)와 아예사 등은 모두 실존인물로, 각각이 이슬람교에서 신성시하는 중요한 종교 지도자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이슬람교에서 금기시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데 있다.

지브릴의 꿈 속에서 마훈드는 무력으로 자신의 종교를 타인들에게 관철시키는 비합리적인 인물이자, 유일신앙을 깨고 다른 세 여신을 인정하는 등의 모순을 보이는 인물이다. 아예사는 이런 마훈드의 마지막 부인으로, 소설에서는 한 도시 전체의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끄는 악마와도 같이 그려진다. 사창가의 열두 창녀가 마훈드의 열두 부인의 이름을 사칭하는 대목과 마훈드를 조롱했던 시인이 열두 창녀의 남편이 되는 대목 역시 다분히 도발적이다.

하지만 지브릴의 꿈에 대해 이슬람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없음, 현실과 꿈, 종교 등에 대해 새로운 물음을 던지려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민은경 교수(영어영문학과)가 살만 루시디의 작가론인 「잃어버린 고국들」(『문학동네』 2007년 여름호)에서 지적했듯, 지브릴은 작품의 초반부터 이슬람교 교인으로서의 신앙심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이 지점에서 자신을 이슬람교의 대천사로 오인하는 모습은 신앙심을 잃은 개인의 종교관이 파편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신앙심을 잃은 개인을 천사로 묘사하고, 결론적으로 그의 삶 전체가 파탄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뤄 그의 꿈을 단순히 이슬람교를 모독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단편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이슬람의, 이슬람을 향한 색안경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악마의 시』를 둘러싼 이 현상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이슬람교는 기본적으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중시하는 종교다. 이슬람교 최고 경전인 코란에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그릇된 것과 분명히 구별되었노라”(2:256), “그대의 주님이 원하셨다면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믿었을 것이라. 그대는 강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느뇨?”(10:99) 등이 명시된 것이 그 증거다.

마호메트를 신의 마지막 사자로 전하며 이슬람교를 가장 완성된 종교로 제시할 뿐, 이슬람교는 그 이전의 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 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상숭배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다신교를 비판하지만, 다신교도들에 대해서도 열린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이슬람교 자체를 해석하는 데도 자유를 보장하며, 다만 잘못된 해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도울 것만을 주장한다.

더불어 이슬람교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마호메트부터가 자신이 전하는 말에 이견이 있을 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했다. 시아바시 사파리 교수(아시아언어문명학부)는 “코란에 우상숭배를 경고하는 내용이 나오고는 있지만 구약성서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며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표현의 자유를 얽맨다고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란에서 종교적 계시자들을 예술로서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확한 규율은 등장하지 않는다”며 역사적으로도 마호메트를 묘사한 예술이 많았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이슬람 초기에는 동전에 마호메트를 새기기도 했으며, 이슬람교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시아파 사회에서도 종교적 지도자인 ‘이맘’을 묘사하는 그림이나 문학작품들이 다수 제작됐다. 『악마의 시』를 향한 일부 이슬람권의 격한 분노가 타당성을 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에 따르면 『악마의 시』의 내용 일부를 문제 삼아 작품 전체를 폄하하고 작가를 비난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이런 비합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권의 분노에 깊이 깔린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서구 열강의 성장과 내부적인 분란이라는 아랍권 사회의 문제들에서 발단이 돼 등장했다. 각종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시작된 아랍 민족주의가 변형을 거쳐 이슬람 근본주의로 발전한 것인데, 이슬람 근본주의는 마호메트의 가르침이 유지됐던 초기의 이슬람으로 회귀하자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 대표적으로는 와하비즘을 들 수 있다. 18세기에 이슬람 복고주의를 주장하며 등장한 와하비즘은 현시대가 이슬람 등장 이전과 같이 부패했다고 주장하며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악마의 시』를 반대한 초기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도 영국의 와하비즘 단체에서 주도한 시위다. 이는 와하비즘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인정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악마의 시』를 금서로 지정했다. 소설의 금서 지정이 이슬람권 공통의 의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호메이니가 종교적 판결로서 파트와를 발부해 살만 루시디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도 이슬람권 전체의 목소리는 아니다. 이란의 경우는 오히려 『악마의 시』가 국가의 허가를 받아 출판된 바 있으며, 이란 신문사에서 이 작품의 서평을 다룬 바 있다. 이란에 책이 출판된 지 1년이 지나서야 발행된 호메이니의 파트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제하고 이슬람권 사회 전반의 주도권을 쥐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행위인 셈이다.

언뜻 종교의 이름으로 문학을 억압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악마의 시』 파동은 이슬람교의 일부 집단이 살만 루시디의 작품과 세계관을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본 결과였다. 하지만 색안경을 낀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파동의 전개 양상에서 이슬람권을 또다시 폭력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종교,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무슬림 사회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있는 셈이다. 사파리 교수는 “『악마의 시』를 향한 폭력적 시위(protest)가 모두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된 것은 맞지만, 이슬람권이 단일한 하나의 단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 세상을 변주하는 프리즘

『악마의 시』는 선악의 논의 속에서 영국과 인도, 이슬람교를 새롭게 재구성했다. 김연경 소설가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이고 무거운 종교라는 소재를 문학으로 옮겨 많은 사람들에게 전한 것 자체로도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이외에도 영국과 인도라는 다문화의 갈등을 풀어내는 등 세계를 새롭게 구현한 점이 특징적”이라고 작품을 평가했다.

그는 “작품 자체가 세상을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넘어서서 작품이 읽히고 해석되는 방식에서도 새로운 세계가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악마의 시』가 이슬람권에 대해서, 그리고 영국과 인도라는 이질적인 문화권에 대해서 꾸준히 담론을 형성해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효용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 자체의 문학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아직 어렵지만, 작품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실로 지대하다는 점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며 세상을 옮기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작품으로서 『악마의 시』의 가치를 제시했다.

헝가리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는 “작품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학이 허구를 기반에 두는 한 문학은 현실을 반영할 뿐 그대로의 현실을 옮길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기보다는 세상을 펼치는 프리즘에 가깝다. 백색광을 여러 빛깔로 분리하는 프리즘처럼, 문학 역시 세상을 여러 방식으로 변주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문학은 단순히 세상을 다양한 빛깔로 변주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문학은 독자들의 삶에 개입해 독자가 가진 생각을 변화시키고, 또 이를 세상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프리즘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세상은 여러 방향으로 변형되고, 또 여러 방향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악마의 시』를 통해 살만 루시디가 세상을 이야기했듯, 앞으로도 문학은 세상을 펼치는 프리즘으로서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파트와: 코란과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의 종교 법률 샤리아(Sharia)에 기초해 내려지는 판결. 법적 판결은 아니지만, 이슬람권에서는 종교적 의무로서 파트와를 따르는 것이 당연시된다.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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