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개성 넘치는 동네책방 - ④ 상상하는 삐삐

인쇄매체의 종말이 점쳐지기도 하는 요즘, 동네마다 자리 잡은 작은 책방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동네책방, 독립서점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형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별난 주제의 책이나 물량이 적어 쉽게 구할 수 없는 독립출판물을 구비해 손님을 끈다. 이번 연재 기획은 저마다의 개성과 철학을 간직한 서점들을 찾아가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① 일단멈춤 ② 스토리지북앤필름 ③ 햇빛서점 ④ 상상하는 삐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겨우 아홉 살이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정말 멋져!” 여기 엉뚱한 말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말괄량이 삐삐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책방이 있다. 서울의 북동쪽 중화동의 한적한 도로 한구석에 위치한 이곳은 어린이 책방 ‘상상하는 삐삐’다. 동네 어린이들의 아지트라는 이곳에 들어서면 높낮이가 다른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이 책꽂이에 가득하고, 고사리손으로 그린 동물 그림이 벽에 붙어있다. 10년 동안 어린이들을 만나 온 이 서점은 작지만 아이들이 꿈을 키워가기엔 충분한 공간이다.

 

딸을 위한 선물이 모두의 책방으로

학원 강사였던 상상하는 삐삐 이계명 대표는 11년 전 겨울 딸을 위해 선물을 하는 마음으로 책방을 열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책 읽을 공간이 많지 않아서 멀리까지 어린이 책방 순례를 다니기도 했다”며 “우리 아이들도 편한 곳에서 좋은 책을 읽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평범한 엄마가 연 책방은 서울의 유일한 어린이 책방으로 10년 넘게 동네에 자리 잡았다. 책방 이름엔 어린이 독서와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겼다. 아이들이 ‘말괄량이 삐삐’의 삐삐처럼 어른들의 명령이나 관습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근처에 어린이 도서관이나 서점이 없던 이 동네에서 상상하는 삐삐는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아이들이 책에 파묻혀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됐다. 단골손님 정미순 씨(49)는 “동네에 어린이책방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서 가게 됐다”며 “큰 아이가 6살일 때부터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책방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책방의 작고 아늑한 2층 다락방에선 아이들이 올라가 작은 몸을 숨기고 편히 누워 책을 본다. 이 대표는 “공부에 치여 바쁜 아이들이 책방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책을 읽고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작은 책방엔 그림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아이의 마음으로 고른 책

상상하는 삐삐는 출판사에서 대량으로 책을 떼오는 대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책을 고르는 남다른 기준을 세워왔다. 이 대표는 “부모님은 지식 위주의 책이나 전집을 아이에게 권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책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일일이 책을 읽어보고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읽어준 뒤 반응을 살펴 책방에서 판매할 책을 고른다. 그동안 아이들을 지켜본 결과 그가 생각한 팔 만한 책은 아이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키워줄 수 있는 동화책이나 소설책이다. 예컨대 그림책 『파도야 놀자』는 주인공 아이가 밀려드는 파도를 쫓다 피하다 하는 모습을 글 없이 그림만으로 그린 책이다. 글이 없다 보니 아이들은 파도와 아이의 모습에 더 주목할 수 있고, 스스로 자기만의 줄거리를 상상할 수 있다.

어린이다운 상상력으로 세상을 뒤집어보는 책들 역시 서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책 『사자가 작아졌어』는 갑자기 손바닥만하게 작아져 물에 빠지고만 사자가 과거 자신이 해쳤던 엄마 가젤의 아기 덕에 목숨을 건진다는 이야기다. 엄마를 잡아먹은 사자를 용서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기 가젤의 모습을 보는 아이들의 상상 속에선 동물의 왕인 사자와 약한 동물인 가젤의 관계가 뒤집힌다. 이 대표는 “아이들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듯 그림책 내용에 집중한다”며 “이 책이 보여주는 생각의 전환은 어떤 수업이나 훈계보다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상상하는 삐삐는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함께 고민하고자 엄마아빠들과 소통하는 장도 마련해왔다. 중랑구의 학부모 독서모임 ‘책과 노니는 사람들’은 이 대표와 지역 학부모들이 함께 꾸린 공동체로 책방에서 단촐한 정기모임을 연다. 책을 함께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정부 지원 유치원에서 책 낭독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교육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벌어진다. 한번은 내용이 어둡고 비관적인 책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현실세계의 어두운 면을 책을 통해 아이들도 알고 미래에는 이를 극복해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 책방 한편엔 아이들이 책을 읽고 그린 그림과 직접 만든 책이 걸려있다.

책으로 세상을 만나는 삐삐의 놀이터

상상하는 삐삐에선 ‘오감만족’ 독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아이들과 학부모 사이에서 ‘선생님’으로 통하는 이 대표는 강사를 따로 초대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직접 수업을 진행해왔다. 추석 즈음이면 추석에 관한 책을 읽은 뒤 전통 놀이 체험, 상차림 체험 등을 해보며 오감을 만족시키는 식이다. 6년째 아이들을 이 프로그램에 보냈다는 정미순 씨는 “흔한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과 활동하면서 책에서 읽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점이 좋았다”며 교육이자 놀이인 상상하는 삐삐의 프로그램에 만족스러워했다.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근처 박물관이나 공원, 농장으로 몰려가 말 그대로 책 속 세상을 직접 체험한다. 우리글에 대한 책을 읽은 뒤 한글 박물관에 찾아가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을 찾아보고, 농사에 대한 책을 읽고 나선 농장에 가 고구마 캐기 체험을 했다. 최근 학교나 기업에서 너도나도 아이들을 위한 주말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지만 책방에서의 프로그램은 아이들을 무리하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고 이 대표는 말한다. 그는 “책을 읽었기 때문에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고 아이들이 책에서 본 것 하나쯤은 건지고 올 수 있게 짚어주기만 한다”며 “가끔씩 ‘맞히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며 내용을 퀴즈처럼 물어볼 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

상상하는 삐삐가 동네 아이들, 부모들과 함께 한 10년은 여느 책방의 손님맞이 시간과는 다른 듯하다.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고 학부모들이 아이 교육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공간이 돼왔던 것이다. 책방을 선물받았던 딸은 어느새 대학생이 됐고 이 대표는 어린 아이를 둔 학부모에게 ‘선배 엄마’로서 도움을 주게 됐다. ‘삐삐’들이 모여 책 속 세상도, 책 바깥 세상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는 시간을 만들어온 곳. 이곳에선 오늘도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 김여경 기자 kimyk3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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