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재벌 2세 또는 3세 실장님들(이따금씩 변종으로 본부장님들)이 떠나간 자리에 특전사 대위가 찾아왔다. 사랑을 고백할 때조차 ‘다나까’체를 버리지 못하는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 시간 이후로 내 걱정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군인 중의 군인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실장님 판타지’를 가장 잘 쓴다는 김은숙 작가가 신작 <태양의 후예>에서는 그녀의 장기를 버리고 ‘상속자들’ 대신 군인을 선택했다. 환상적인 로맨스를 선보이기에는 너무 살벌한 직군 아닌가.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또 어김없이 그녀에게 ‘영업당하고’ 있는 중이라니 그녀의 영업 비밀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판타지일 것이다. 여주인공은 ‘빽’이 없어 번번이 의대 교수 임용에서 밀려나 억울한 눈물을 삼킨다. 그러나 우연히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인사가 된 그녀는 드라마 방영분상 단 1회만에 매우 ‘손쉽게’ 교수 자리에 오른다. 게다가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냅니다, 내가”라는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완벽한’ 남자가 곁에서 열렬한 구애를 펼치기까지 하니 대체 그녀에게 부족할 게 무언가.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던 그와 그녀는 재난 현장에서 맞닥뜨린 일련의 역경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나가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던 의사로서의 ‘숭고한’ 사명감마저 되찾게 되고, 자동적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속물성 또한 해소된다. 물론 드라마가 그 속물스러움마저 사랑스럽게 포장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세상 어디에도 없을 ‘완벽한’ 행복이 ‘손쉽게’ ‘성공적으로’ 완성되는 ‘숭고한’ 판타지가 밤마다 눈앞에서 펼쳐진다는데 ‘영업당하지’ 않고 배길 사람이 있을까.

▲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게다가 지옥철, 전쟁터 같은 회사와 학교, 다시 지옥철을 무한히 반복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일자리 하나, 아늑한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는 불행과 비참함의 현실 속에서, 이런 종류의 근사한 판타지는 정말로 달콤하다. 매혹적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놀랍게도 이 드라마의 시청자뿐만 아니라 배우, 그리고 대중문화 평론가들까지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것은 판타지다’, ‘판타지는 그저 판타지로 보자’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판타지가 판타지 그 자체로 너무나도 쉽게 승인돼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예의 사태를 이미 오래전에 예견했던 기 드보르의 엄중한 경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넋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 그가 이러한 지배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실로 이 드라마가 지닌 영업 능력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하다. 얼마 전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까지도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관을 확립하는 드라마, “국가 정신과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극찬했다는데, 과연 그들도 ‘영업당한’ 것일까. 아니면 영업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오고가는 모종의 연대감을 표출한 것일까. 무엇이 됐든 판타지라는 기만적인 낙원이 번성할수록 삶은 황무해지고 사람들은 쉽게 잠드는 법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를 노려 이득을 보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다. 그러니 모쪼록 다가오는 20대 총선에서는 ‘그들’의 영업 비밀이 통하지 않기만을 소망해볼 밖에. 그것은 분명 달콤한 판타지가 아닌, 지독한 현실이 될 터이므로.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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