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금서 다시 읽기

지난해 가수 아이유의 곡 ‘제제’(Zeze)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쉽게 공론화되지 못했던 ‘소아성애’라는 주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 보였다.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5살 제제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곡은 어린아이인 제제를 향한 화자의 성적 시선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소아성애를 부추긴다’며 비난받았다. 이를 계기로 새삼스럽게 재조명됐지만, 사실 소아성애적 코드는 우리에게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성인 여성에게도 ‘애교’나 ‘귀여움’이 하나의 미적 기준으로 적용되는 모습부터 수많은 걸그룹들이 소녀와 여자의 경계에서 삼촌팬을 겨냥한 이른바 ‘섹시 컨셉’을 앞세우는 모습까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는 ‘롤리타 컴플렉스’가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는 ‘롤리타’라는 단어는 1955년 처음 출판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등장하는 여자아이 돌로레스 헤이즈의 애칭이다. 12세 여자아이 돌로레스에게 강렬한 성적 욕망을 품은 중년 남성 험버트 험버트를 그린 이 책은 그 충격적인 소재로 인해 영국과 미국에서는 출판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출판한 후에도 기나긴 소송 사건에 휘말렸다. 하지만 오늘날은 작품 속에 숨겨진 아름답고 완벽한 문체, 다양한 유희, 독특한 극의 구조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다.

 

▲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김진준 옮김/ 문학동네/ 560쪽/ 13,000원

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매력적인 외모와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갖춘 남성 험버트는 9세에서 14세 사이 사춘기 전후의 여자아이에게만 성적 욕구를 느끼는 인물이다. 물론 모든 여자아이를 향한 욕구는 아니며, 그가 ‘님펫’(nymphet)이라 이름 붙인 특별히 매력적인 여자아이들을 향한 욕구다. 소설 속 험버트는 어린 시절 애너벨과의 첫사랑이 이뤄지지 못한 탓에 이런 욕구를 갖게 됐다고 항변한다. 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비밀스러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놀이터에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거나, 비교적 어린 창녀와 관계를 맺는 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애너벨을 연상시키는 12세의 여자아이 돌로레스 헤이즈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마음속에서 그녀에게 ‘롤리타’라는 애칭을 붙인다. 험버트는 오로지 돌로레스와 함께 있기 위해 그녀의 엄마인 샬롯과 결혼까지 한다.

험버트의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욕망을 알아버린 샬롯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험버트는 롤리타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모텔 순회를 시작한다. 낮에는 관광을 하고 밤에는 정사를 나누는 생활을 지속하던 중, 롤리타는 돌연 험버트로부터 도망쳐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3년 후 롤리타가 퀼티라는 극작가를 따라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험버트는 퀼티를 살해하고, 이 살인으로 인해 험버트가 저지른 범죄의 전모는 모두 드러나게 된다.

불순한 의도의 결혼, 부모를 잃은 아동의 납치, 아동과의 성교, 살인까지 저지른 소아성애자 험버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증오스러운 범죄자다. 지금 들어도 소름 끼치는 악질 범죄자 험버트의 이야기가 60년 전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 금지 처분을 받은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특히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사회 전반의 가부장적 시선을 철폐하고자 한 2기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며 포르노그래피가 여성 억압적인 매체로 규정되고, 외설적인 매체에 대한 비판이 매우 거센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 사회가 어린이의 성적 대상화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롤리타』를 향한 당시 사회의 거부감은 매우 당연했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롤리타』의 출판을 허락한 곳은 외설문학으로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의 올랭피아 출판사 한 군데뿐이었다. 나보코프는 올랭피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올랭피아를 통해 『롤리타』를 출판하게 된다. 이 때문에 『롤리타』는 ‘야하다’는 소문을 등에 업고 화제를 모으며 이후 몇 차례 더 출판금지명령, 전량회수명령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에서의 출판 금지 처분이 풀린 후에도 『롤리타』는 스캔들의 중심에 서야만 했다. 소재 자체가 큰 화제를 모으면서 실제로는 외설적인 부분이 없음에도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 소아성애라는 비윤리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비도덕적인 험버트를 응징하는 윤리적 교훈이 없다는 비판이 거셌다.

선정성과 도덕성에 대해 너무도 많은 논란이 일자 보다 못한 나보코프는 1957년에 ‘작가의 말-『롤리타』에 대하여’라는 글을 작품에 덧붙였다. 그는 작품이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소재 자체에만 집중하는 독자와 출판사를 비판했다. 『롤리타』를 단순한 포르노그래피로 읽는 독자들을 향해 나보코프는 “독자는 음탕한 색채가 점점 늘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재미없고 지루해하며 읽기를 멈춘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 윤리적 교훈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사회 개혁적인 교훈이나 주장을 담는 문학을 혐오한다’고 밝히며 자신이 작품에 그 어떤 주장이나 교훈도 담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결국 나보코프는 스스로 자신의 의도를 직접 설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상구 교수(청운대 영어과)는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은 이런 의도로 이렇게 저렇게 구성한 것이라고 마술의 전략을 밝힌 셈”이라며 “나보코프는 작품에서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인데 그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 작가와 독자가 벌이는 한 판의 게임

외설도 아니고 교훈도 아니라면 나보코프는 왜 『롤리타』를 썼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보코프가 문학의 미학적 측면을 중시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나보코프는 사회적인 주장이나 교훈을 넣은 문학을 혐오했고, 그런 교훈 없이 소설은 소설 자체로 유의미하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운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그는 작품 안에 다양한 트릭, 퍼즐, 유머를 집어넣어 재치 있고 아름다운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독자가 그 구조물 속에서 작가의 트릭을 간파하고, 퍼즐을 풀고, 유머를 이해함으로써 작가와 함께 유희를 즐기기를 바랐다.

나보코프는 좋은 작가는 작품 속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마법사’(enchanter)가 돼야 하며 좋은 독자는 작품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다시 읽는 독자’(rereader)가 돼야 한다 말했다. 권철근 명예교수(한국외대 러시아어과)는 “나보코프는 독자를 의식한 글쓰기를 했으며, 나보코프는 독자 참여적 소설의 시초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롤리타』 전반에는 아름다운 문장, 다양한 말장난, 독특한 구조가 숨어있다. 나보코프 특유의 아름답고 완벽하고, 복잡한 문체는 대중들도 익히 알고 있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로 시작되는 『롤리타』의 서두는 이미 너무나 유명하다. 롤리타를 끊임없이 찬양하는 서술자 험버트의 풍부한 묘사는 미학적 구조물로서의 『롤리타』를 완성한다.

소설의 행간에서 느껴지는 에드거 앨런 포, 플로베르, 프루스트, 조이스 등과 같은 다양한 문학가의 향기는 독자가 고민해볼 만한 유희 거리를 제공한다. 험버트가 어린 시절 첫사랑 애너벨을 회상하며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나 ‘내 죽은 신부’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부분은 시인 포가 그의 어린 약혼녀 버지니아를 떠나보내고 쓴 시 ‘애너벨 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가장 대표적인 트릭은 나보코프만의 독특한 서술방식이다. 나보코프는 주인공 험버트가 지닌 진실성의 문제를 독자에게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노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함으로써 독자와 일종의 게임을 벌인다. 다시 말해 험버트의 위선과 거짓말을 직접 폭로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해독할 여지를 소설 속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체포된 후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고백록’의 형태를 띤다. 이 고백 속에서 그는 자신이 역겨운 범죄자보다는 섬세한 시인에 가까움을 주장하며 자신의 행적을 미화하는 데 소설 전체를 할애한다. 그는 독자가 신뢰할 수 없는 기만적인 서술자인 것이다. 험버트는 9세의 베아트리체를 영원히 사랑했던 단테, 14세도 되지 않은 사촌 버지니아와 결혼했던 에드거 앨런 포 등 소아성애적 행태를 보였던 위인을 100명 가깝게 등장시키며 롤리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합리화한다.

험버트의 자기 미화는 단어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권철근 교수는 “작품 속에는 페도필리아(pedophilia, 소아성애)라는 단어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며 서술자 험버트가 소아성애를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단어를 모두 새로운 단어로 치환해버린다고 설명했다. 나이 어린 소녀 역시 험버트 스스로 만들어낸 ‘님펫’이라는 신조어로 치환함으로써 부정적인 뉘앙스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한다.

이처럼 독자를 속이려 드는 ‘독자 기만적 구조’에서 독자는 작가와 게임을 펼치게 된다. 독자는 기만적인 서술자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추악한 진실이 서술자에 의해 어떻게 미화되는지를 끊임없이 추적하게 된다. 권철근 교수는 “험버트의 고백록 『롤리타』는 서술자 주인공의 자기 정당화”라며 “그러한 구조 속에서 독자들은 고백록이라는 장르의 진정성 문제, 험버트가 어떻게 자신을 정당화시키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롤리타』는 어느 변태적인 인간의 외설적인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술자의 추악한 고백의 진실을 폭로해야 하는 독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예술은 금지된 것을 꿈꾼다

『롤리타』의 뛰어난 문학적 가치는 오늘날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윤리적인 소재를 사용해도 상관없는가? 그 소재에 대한 사회적, 윤리적, 인간적인 고민 없이 단지 예술을 위해 사용해도 괜찮은가? 나보코프는 소아성애적 범죄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소아성애적 범죄가 어떻게 여겨지고 다뤄져야 하는지를 특별히 고민하지는 않는다. 금기를 다루는 예술의 딜레마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아이유의 ‘제제’, 박범신 작가의 『은교』, 안 퐁텐 감독의 「투 마더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까지 금기를 건드리는 예술은 대중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술이 아니고서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주제를 자유롭게 논할 통로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술이야말로 금기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과 담론적 모색이 오갈 수 있는 장이며, 그 장이 제대로 기능할 때에만 우리 인식의 지평은 확장될 수 있다. 나보코프 역시 소아성애에 대한 사회적 주장을 하기 위해 『롤리타』를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롤리타』가 작가의 손을 떠나 세상에 던져진 후 독자는 이를 계기로 금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나보코프의 『롤리타』 이후 소아성애는 ‘페도필리아’라는 정신병리학적 범주를 넘어서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새로운 이름 하에 사회적, 문화적으로 더 넓게 이해되며 논의될 수 있는 지평을 연 것이다. 그렇게 예술이 끊임없이 금지된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 인식의 지평도 넓어지지 않을까.

 

삽화: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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