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지금도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할까?
우리는 왜 지금도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할까?
  • 대학신문
  • 승인 2016.04.10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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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 변창구 교수(영어영문학과)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나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는 것이 고상한 정신이냐,

아니면 바닷물처럼 많은 고난들과 싸워

이를 물리치는 것이 고상한 정신이냐?

To be, 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Hamlet, 3. 1. 57-61)

 

너무나 유명한 이 독백에서 햄릿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숙제 앞에서 삶을 지속해야 할지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 독백은 햄릿의 삶에 다가오는 혼란과 이에 대한 그의 곤혹스런 대응, 그리고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뇌하는 모습까지를 잘 보여준다.

『햄릿』의 주인공 햄릿은 극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엄청난 고난에 직면한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사이 왕이었던 아버지 햄릿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삼촌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차지한데다가, 왕비였던 어머니마저 삼촌과 재혼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황망한 가운데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그에게 복수를 명령한다. 선왕의 유령은 자신이 동생, 햄릿의 삼촌에게 독살을 당했으니, 이 억울한 일을 기필코 복수해달라고 말한다. 친구 호레이쇼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감시의 눈초리로 감시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외톨이가 된 햄릿에게 가야 할 길은 험난하고 인생은 괴롭기만 하다.

위의 독백이 보여주듯 셰익스피어는 전쟁과 바다의 이미지를 사용해 이러한 햄릿의 심경을 관객에게 여실하게 드러낸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삶이라는 일반론적인 차원에 비유하는 이미지를 사용해 독백의 의미와 외연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햄릿의 ‘고난들’(troubles)은 그의 개인적 차원의 불행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의 이러한 고난을 전쟁과 바다라는 거대한 주제와 연결시킨다. 햄릿의 고민과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의 고민이 돼 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microcosm)가 된다. 온갖 상상력을 유발하는 이미지를 사용해 셰익스피어는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주제로 관객을 인도한다. 이제 이 작품은 주인공 햄릿 개인의 현안을 넘어서서 혼란의 극치를 달리는 세상에서의 인생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가 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복수의 임무를 앞둔 햄릿의 괴로움이 삶의 본질적인 딜레마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셰익스피어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부터 우리 모두의 고민을 끌어내고, 이를 이미지 등 시적 장치를 통해 작품의 차원을 승화시킨다. 이미지는 연상 및 유추를 유도해 관련된 주제의 차원을 확대시켜준다. 햄릿은 우리 모두의 소우주가 된다.

햄릿은 풀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혀 좌충우돌하면서 삶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 그는 드디어 복수의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질 때도 신의 섭리가 있어.....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

There is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The readiness is all. (5. 2. 217, 220)

 

햄릿이 자신의 과업을 달성한다 해서, 그리고 삶에 대한 혜안을 얻었다고 해서, 삶의 패러독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극에서든 희극에서든 셰익스피어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온갖 현안이 조금 다른 형태로 바뀔 수는 있어도 그게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없는 혼란스런 세상에서 고뇌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햄릿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고귀한 본질을 읽는다. 그래서 감동한다.

우리는 보통 『햄릿』을 우유부단함, 『오셀로』를 질투심, 『맥베스』를 야망, 그리고 『리어왕』의 경우를 분노가 초래한 비극이라고 한다. 비록 우유부단, 질투심, 야망, 분노 같은 성품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해도, 이 작품들을 이러한 주제에 대한 극이라고 하는 것은 축소지향적 해석이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보는 사람들 중에 오로지 야심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 유유부단하기 그지없는 사람, 화만 잘 내는 사람들은 없지 않은가.

인간은 온갖 감정과 욕망들이 복합적으로 모여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오셀로의 질투심이 단순히 우리의 정열 자체보다 더 도드라지는, 그 자신만의 성격상의 결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질투심은 오셀로의 비극적 결함을 표시하는 한 지표에 불과하다. 리어왕의 분노도 그의 비극의 중심에 결코 홀로 자리하지는 못한다. 마침내 자신이‘어리석고 바보 같은 늙은이’(a very foolish fond old man, 4. 7. 62)임을 깨달을 때도, 리어왕이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결점을 억제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리어왕이 고난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고 보는 견해는 작품을 너무 단순하게 축소시키는 셈이다. 리어왕이 말하는 ‘바보들의 무대’인 이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의 자만과 오류가 가득한 무대다. 리어왕이 막내딸 코딜리어를 만나 용서를 구하듯, 그는 자신이 ‘어리석고 바보 같은 늙은이’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맥베스의 비극적 운명의 원인이 그의 야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작품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맥베스가 야심 덩어리긴 하지만 그의 아내가 말하듯, 그는 상호모순 되는 성품을 지닌, 매우 인간적인 존재다.

 

높은 지위를 탐내시지요, 그걸 신성하게 얻고 싶어 하시고요, 나쁜 짓은 하기는 싫어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얻고 싶어 하시고요.

What thou wouldst highly,/ That wouldst thou holily; wouldst not play false,/ And yet wouldst wrongly win. (Macbeth, 1.5.20-22)

 

맥베스의 양심이 그의 야심에 제동을 걸어보지만, 그는 기어이 왕을 시해하고 만다. 다만 그를 더 고뇌하게 만들 뿐이다.

『맥베스』의 결말을 보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 맥베스에게 죽음이라는 징벌이 가해지고 맬컴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혼란스러운 스코틀랜드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거듭난다. 모든 것이 정리돼 밝은 미래가 약속되는 듯하다. 과연 그러할까? 어쩌면 맬컴도 자신의 귄위를 유지․확보하기 위해 왕위를 찾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폭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또 맬컴에게 도전하는 세력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며, 그 와중에 희생자가 생길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금 이 작품이 보여주었던 혼란의 와중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 세상이 그러하다. 확실하게 안정된 것이 지속되기가 쉽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상대적이며 불확실하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처럼 영웅도 악당도 아닌 선악이 혼재하는 인간을 극 속에 제시한다. 인간은 무언가에 질서를 부여하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쓰지만, 결국 그들은 그리 깔끔하게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늘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처럼 다양한 요인들이 얽혀있는 유동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며, 실수를 거듭하고 고난의 인생을 감내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온갖 소리와 분노로 가득한’(full of sound and fury) 상황에서 시작한 이 극은 맥베스가 깨달은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다’(Signifying nothing, 5. 5. 27-8)라는 말로 삶의 의미에 방점을 찍는 듯하다. 하지만 의미가 전혀 없을까?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우리의 삶에 온갖 의미를 부여해 더욱 복잡한 상념을 자극함으로써 맥베스의 고뇌를 우리에게 다가오게 한다.

흔히 생각하듯 문학작품이 권선징악 요소가 강한 삶의 교훈이나 생활의 지침을 준다고 여긴다면 이는 착각이다.(이 세상에서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가 제대로 이뤄지는 걸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좋은 문학작품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행동지침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삶의 실제를 그릴 뿐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과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며 선악이 어우러져 정답을 내기가 정말 어려운지를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대신 생각할 거리를 우리에게 던진다. 작품의 말미에 다다르면 우리는 속 시원한 답을 얻는 대신 우리가 직면해야 할 이 세상의 패러독스와 선택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도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할까? 다양한 견해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우선 셰익스피어는 어느 다른 작가들보다도 삶의 이야기를 풍부하고 복합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작품 속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며 더 큰 이야기로 발전한다. 악한과 주인공이 서로 얽혀있고, 심지어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조를 도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복합적 요소들이 매우 정교하게 얽혀 있어서 처음 그의 작품을 대하면 우리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자신의 의향이나 미래의 행동 혹은 결심을 말하지 않고, 작품이 제기하는 혼란스런 현실과 이상적인 삶 사이에서 야기되는 온갖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우리를 현혹시킨다. 이러한 그의 작품의 폭과 깊이는 다른 작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의 실제를 제시한다. 게다가 셰익스피어는 비록 400여 년 전 영국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우리와는 거리가 아주 먼 세상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다행스럽게도 당시 영국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나 연극의 관행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이 많지 않아도 나름대로 감상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관객들은 그의 작품에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극장을 찾는다. 시공을 넘어선 관객들의 관심과 욕구에 어울리게 셰익스피어는 늘 다른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16~17세기 영국인들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한 제한적인 주제를 다루는 셰익스피어의 극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예전의 관객들에게 들려주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로 변신해 오늘날의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말했던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엔 우리의 철학으론 상상도 못할 일이 수없이 많다’(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Hamlet, 1. 5. 167-8) 하늘과 땅 사이의 온갖 소재를 다루는 셰익스피어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오늘날도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찾는다. 우리 삶의 모습을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의 세계가 연극인줄 알면서도 우리를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속으로 몰입시키면서 감동과 전율을 선사하는 그의 마력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 the mirror up to nature, Hamlet, 3. 2. 22)이다.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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