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동안 외친 축제의 함성, 그 메아리를 듣다
70년 동안 외친 축제의 함성, 그 메아리를 듣다
  • 조수지 기자
  • 승인 2016.04.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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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서울대 70주년- ④ 서울대의 축제

1948년 개최된 제1회 ‘예술제’ 이래로 70년 동안 서울대 축제는 역동적으로 변화해왔다. 특히 축제운영전담기구 ‘축제하는 사람들’(축하사)은 2003년 설립 이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축제를 이어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서울대인에게 축제는 과연 대학문화의 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서울대 축제에 가면 바보’라는 오명은 여전하고 최근 들어서는 다소 상업화된 모습으로 학생들과 더 멀어졌다.

오늘날 서울대 축제를 둘러싼 고민과 문제제기는 비슷한 형태로 과거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축제는 어떻게 변해왔고 우리 선배들은 대학생이 이끄는 공동의 장으로서 축제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대학신문』은 서울대 개교 70주년을 맞아 서울대 축제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한다.

Ⅰ. 1980년대까지, 모여서 하나 되다(大同)

개교 직후 서울대엔 축제라고 할 만한 것이 드물었고 산발적인 행사가 더 많았다. 서울대에서 축제가 첫 꽃봉오리를 틔웠던 것은 1948년 봄이었다. 현재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예술제’가 열렸으나 6・25전쟁 발발로 인해 이어지지 못했다. 시국이 불안정했던 1950년대엔 한글날 기념식전, 단과대별 개교기념식 등 기념행사가 많았다. 1957년 대통령령으로 대학생 사상통일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 학도호국단이 제1회 ‘서울대문화제’를 연합된 형태로 열었다가 4·19 혁명으로 학도호국단이 해체돼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 1959년 학도호국단 학예부 주최 제2회 문화제 속 연극제가 벌어지는 풍경.

단과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1960년대 축제엔 학술과 놀이가 공존했다. 문리과대학에선 ‘학림제’(學林祭), 농과대학에선 ‘상록문화제’(常祿文化祭)가 열렸다. 학생들은 4·19 희생자를 기리거나 심포지엄, 강연회 등 학술행사를 활발히 진행하는 한편, 카니발, 포크댄스, 장기대회 등 다양한 놀이를 축제에서 즐겼다. 상록문화제에 참여했던 김완배 교수(농경제사회학부)는 “당시 축제는 낭만이 넘쳤고 구성원 모두가 적극 참여해 친목을 다지는 장이었던 한편 대학축제답게 학술행사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고 회상했다. 1963년 11월 창경궁에서 열린 ‘대학제’는 이화여대 학생 5,000명을 초청하고 서울대생이 뒤섞여 파트너를 맺는 대규모 쌍쌍파티였는데, 당시 1만명에 달하는 남학생이 찾아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많은 학생들이 파트너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는가 하면 파트너가 돼달라고 간청하거나 자기 티켓 번호를 큼직하게 써서 등에다 붙이고 돌아다니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대학신문』 1963년 11월 7일 자)

▲ 1970년대 열린 축제에서 청춘남녀가 쌍쌍파티를 즐기는 모습.

학생들만의 축제가 탄압받던 시기도 찾아왔다.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1975년, 캠퍼스 종합화가 이뤄진 동시에 학도호국단이 부활했다. 이어 학도호국단이 주최한 ‘대학축전’은 표면적으로는 대동(大同)할 수 있는 장이었지만 한편으론 박정희 정권의 캠퍼스 통제 의도가 숨어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본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축제를 ‘어용 기관이 우민화를 시키려 만들어낸 축제’라며 참여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축제날이면 어김없이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지금 같은 시국에 쌍쌍파티가 웬말이냐’며 축제거부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대학신문』 2005년 10월 17일 자) 유신 말기 학생들은 축제에서 정부를 풍자하는 ‘모의국회’ 행사, 투쟁 의지를 고취시키는 농악공연 등을 시도해 독재정권에 대항했고, 학도호국단은 이를 승인하지 않거나 축제를 축소해버렸다.

▲ 1987년 개최된 대동제 '진군제' 중 '땡전뉴스'로 비판 받던 'KBS 9시 뉴스'를 풍자하는 연극. 당시 축제에선 부조리한 공권력과 언론을 비판하는 풍자적인 공연이 진행됐다.

이후 학내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운동권 총학생회가 주최한 축제는 학생 운동의 일부로 여겨졌다. 1980년대 초반엔 축제가 학도호국단의 탄압을 피해 건물 안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국악동아리 ‘여민락’의 일원이었던 조형택 교수(생명과학부)는 “바깥에서 공연을 할 수 없어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공연을 했다”며 “민중가요 동아리 ‘메아리’의 공연처럼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공연이 인기였다”고 회상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학생들은 사회참여정신과 저항정신을 내세우며 ‘대동제’를 열었고 민중과 민속에 관한 관심을 반영한 행사로 이를 채워나갔다. ‘대동놀이’가 투쟁의 장에서 이뤄진 대표적인 행사였다. 방민호 교수(국어국문학과)는 “대동놀이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 연극적인 시나리오를 갖는 집체적인 연극이었다”며 “민중과 시민 역할을 맡은 단과대 학생들이 독재 세력 역할을 맡은 단과대 학생들에게 진압당하는 식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대동굿’, 탈춤 공연, ‘장승제’ 등 전통과 민속이 깃든 행사도 있어 많은 학생들이 모이곤 했고, 그 길로 축제가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Ⅱ. 1990년대 이후, 더 다양한 재미로

대동제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지만, 공동체 의식과 저항정신의 열기는 전보다 옅어졌다. 이승한 문화평론가는 “1990년대 초반 들어서 사회가 파편화됐다”며 “대동의 의미나 공동체로서의 우리보다는 개인적인 것, 문화적인 것을 추구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를 반영하듯 축제가 교문 앞 시위 행렬로 이어지던 일도 1992년 이후 종적을 감췄다. 저항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던 축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율이 본격적으로 떨어졌던 것도 이즈음이다.

대학사회의 분위기가 변함에 따라 대동을 강조하던 기조에서 벗어나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재미를 추구하는 축제가 등장했다. 전체집중행사가 축소되고 소규모 행사 ‘단대마당’ ‘과밤’의 비중이 늘어났다. 1993년 가을 축제 ‘가슴 속 자신감으로’의 ‘열린 문화제’에서 학생들은 전시대에 방명록을 쓰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또 틀이 정해져 있던 집체적 연극의 비중이 줄고 장르·주제를 불문한 다채로운 공연이 열렸다. 이에 ‘학우들의 다원화 현상에 대해 총학생회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그 실체와의 마주서기를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대학신문』 1993년 10월 18일 자)

▲ 2000년 가을 축제를 담은 『대학신문』 지면. 한 학생이 지금은 DDR로 불리는 펌프 실력을 뽐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축제엔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됐다.

이후 학생들의 이목을 끌고 축제에 흥미를 더하려는 경향이 과열돼 비판에 직면한 경우도 있었다. 1999년 당선된 최초의 비운동권 선본 ‘광란의 10월’이 이듬해 벌인 봄축제 ‘우리도 재밌자’는 연예인을 무대에 세우고 스타크래프트 대회, 당구대회, 펌프, 미팅을 벌였다. 기존 대동제의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이 축제는 ‘대학축제에 대한 고민 없이 놀이에만 치중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이 당시에는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인식해 관악 주민들과 함께하는 행사도 종종 열렸다. 1990년 봄축제 ‘새날다짐’의 ‘관악골 주민 한마당’에선 관악·동작지구 주민을 초청해 지역 선거 후보를 평가하는 집담회를 열었고, 1994년 가을 처음 열린 ‘녹두문화제’에선 아예 녹두거리에서 축제를 열어 주민들과 노래자랑, 벽화 그리기 등을 하며 함께 놀았다. 이후 몇 차례 이어진 이 축제는 관악구청의 금전·행정적 지원을 받았고 수많은 녹두 주민이 참여해 훗날 서울대 부근 신림9동의 동명을 대학동으로 개칭하는 데 영향을 줬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여전히 운동권이 주류였던 총학과 분리돼 일반 학생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생겼다. 2003년 생긴 독립적인 축제 운영기구 축하사가 그 중심이었다. 이후 매 축제마다 축하사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기조를 정하는 형태가 정착돼 2012년 봄 ‘복고 또 복고’처럼 당시의 유행을 반영하거나, 지난해 봄 ‘일해라 절해라’처럼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는 기조가 등장했다. 현재 축제는 록, 힙합, 댄스 등 다양한 공연팀의 무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놀이 형식의 행사와 축제 기간 내내 지속되는 장터가 곁들여지는 형태가 됐다. 축하사 출범으로 축제가 다양한 길을 모색해오고 있지만, 저조한 참여율과 더불어 ‘재미없는’ 축제의 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Ⅲ. 서울대 축제사, 세 가지 관전 포인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축제는 크게 변모했지만, 축제의 발자취를 들여다보면 축제를 이끄는 이들과 축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공통된 화두를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학신문』은 △다양한 참여자 △사회적 의제 환기 △자율성 측면에서 그간의 논의들을 짚어봤다. 축제들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평가들로부터 오늘의 축제를 넘어 내일의 축제를 고민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다양한 우리가 만나는 장

사람이 모이는 장인 축제가 존재 의미를 갖기 위해선 다양한 학내 구성원 다수가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 서울대 축제는 저조한 참여율을 면치 못하고 있어 거의 모든 학생들이 참여해 응원의 열기를 더하는 ‘연고전’과 대조된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서울대 축제가 공연 일색이라 공연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기 어려운 점, ‘서울대 축제’하면 떠오르는 특색이나 대표성이 부재한 점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지적돼왔다. 더불어 시・공간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도 제기돼왔다. 김한주 씨(재료공학부·15)는 “공대생의 경우 총장잔디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3차 시험을 보기 때문에 시험기간까지 겹쳐 축제에 참여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과거 대동제는 지금보다 참여율이 높았지만 참여자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는 있었다. 1970, 1980년대의 축제는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장이었기보다 운동권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는 투쟁의 장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에 힘을 실어줬지만 이념성과 다양성 사이의 균형도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1986년 가을대동제 ‘함성제’ 평가회에선 1980년대 이후부터 운동성·이념성을 강하게 표출하던 축제가 많은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대학신문』 1986년 11월 10일 자) 실제로 한 인문대 교수는 “당시 축제는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며 “획일성을 강요하며 축제를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시국이 엄중해 누구도 그런 의견을 표출하진 못했다”고 말했다.

이후 서울대 축제가 비운동권 학생을 포괄하도록 변화한 바탕엔 이념성을 경계하고 학내 구성원 누구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학생들의 고민과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축하사 창립멤버 안승준 씨(디자인학부・99졸)는 “총학과 별도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자유로운 표현이 보장되는 축제를 기획하고자 했다”고 이야기했다. 비운동권 학생들뿐 아니라 다양한 학내 소수자를 포괄하려는 노력도 되돌아볼 수 있다. 1992년 가을대동제엔 수화동아리 ‘손말사랑회’의 수화 발표제 ‘제1회 까치들의 이야기’가, 1996년 봄 ‘Let off SNU’에선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 ‘큐이즈’의 전신인 ‘마음003’이 주최한 ‘이반영화제’가 열렸고, 2003년부턴 외국 학생들이 자국의 문화와 음식을 소개하는 자리 ‘세계음식축제’가 마련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관악산자락에 위치한 캠퍼스의 지형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많은 학생들의 참여를 끌어오려 노력한 사례도 있다. 2005년 축하사는 트럭에 이동식 무대를 설치해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는 퍼레이드 행사 ‘LPG’(Live Performance Guerilla)를 기획했다. 더불어 현재까지도 ‘어쿠스틱 캠핑’으로 이어지고 있는 캠핑식 행사 ‘총야영 행사-별똥별만이 꿈을 꾼다’(1994년 봄축제 ‘중구난방-우리의 목소리로’)에서는 총장잔디에서 학생들이 밤을 지샜다. 이는 수업 후 축제를 즐기는 대신 지하철 시간에 맞춰 귀가하던 학생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민소정 씨(생물교육과·94졸)는 “당시 축제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친구들과 오순도순 모여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캠핑행사는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대학생의 시선으로 목소리를 내며

과거부터 서울대 축제는 사회적인 의제를 환기하는 역할을 해왔다. 공권력에 맞서는 투쟁적인 구호를 외치기도 했고 소외된 계층의 어려움에 공감하기도 했다. 김완배 교수는 “1970년대 초 상록문화제에선 의제를 지정해 학술 토론 대항전을 벌였다”며 “농민들의 쌀값을 어떻게 하면 정당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회상했다. 사회의식이 부재한 축제도 있었지만 비판적인 목소리와 반성이 뒤따랐다.

그런데 학생들의 욕구가 다원화되고 ‘축제다운’ 재미를 추구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오늘날, 축제가 사회 의제를 논하는 장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축하사는 대학생들의 삶에 밀접한 의제에 주목하는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축하사 서진호 행사팀장(컴퓨터공학부·13)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재미와 더불어 어떤 메시지를 사회에 던질 수 있는가”라며 “대학축제인 만큼 대학생의 시선에서 던질 수 있는 메시지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2013년 봄 ‘지겹지 아니한가, 청춘노릇’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격언을 비웃듯 동명의 만보기 흔들기 대회를 개최했고, 지난해 봄 갑질을 비판한 ‘일해라 절해라’는 대한항공 회항과 맞물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조형택 교수는 “현재도 여전히 사회적 문제, 특히 대학생들이 주목해야 할 청년문제가 존재하니 대학생들의 시선으로 포착한 문제들을 축제를 통해 재기발랄하게 제기하고 사회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의제 설정 노력이 실제로 참여자들에게 울림을 주기 위해서는 구호에 끝나지 않고 그에 맞는 행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은우 씨(역사교육과·14)는 지난해 가을축제 ‘어른표류기’에 대해 “n포 세대라는 구호와 세부 행사가 어울리지 않아 컨셉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고 평했다. 의제를 제시하면서도 기조에 맞는 행사를 마련해 축제가 곧 공론장이 됐던 경우도 있다. 1995년 봄 축제 ‘해방선언-끝나지 않은 부활의 노래’에선 광주항쟁 사진전과 연극 공연이 열려 학생들이 구체적인 경험으로 광주항쟁을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의 손으로 일군 우리의 축제

벚꽃축제부터 음악페스티벌까지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상황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는 넘쳐난다. 이승한 문화평론가는 “학생들이 직접 축제를 만들어나간다는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만들어진 축제를 선택해 소비하는 소비자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학생이니 서울대 축제에 참여하라고 당위를 들이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범람하는 축제들 사이에서 서울대 축제가 참여자들에게 나름의 의미를 줄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서울대 축제를 돌아보면 그 70년의 역사는 우리의 힘으로 축제를 열고자 노력하고, 그 결과 나온 콘텐츠의 가치가 우리 안에서 공유되도록 노력해 온 지난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학도호국단의 통제 속에서 건물 안에서라도 우리의 손으로 축제를 일궈내려 했고, 대동의 의미가 흐려지고 가벼운 재미와 놀이를 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안에서 울림을 줄 수 있는 무게 있는 가치를 모색해왔다.

이런 생각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서울대 축제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안승준 씨는 “실험성과 상업성의 완충지대에 있는 대학축제가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장이 되면 더 다양성이 있는 청년문화의 시발점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승민 씨(농경제사회학부·15)는 “우리학교 축제는 참여율이 높거나 라인업이 화려하진 않지만 타 대학 축제보다 학생들이 주도한다는 느낌이 강했다”며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학생들의 주체성을 없애고 연예인들 위주의 축제를 진행하는 것은 단지 축제의 휘발성만 높이는 꼴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상업성을 배제하고 완벽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축제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 축제 기획과정에 대규모의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진호 행사팀장은 “지난해 가을 총동창회 측에서 1,000만원 정도 지원을 받지 못해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선) 기업의 자본을 끌어와야 했다”고 말했다. 결국 푸드 트럭과 기업 프로모션 부스가 많이 들어선 지난해 가을 ‘어른표류기’는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축제라는 비판을 받았다. 연예인 초청 무대에 대해선 다수가 관심을 가질 만한 화려한 대형행사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의견과 ‘돈 드는’ 축제를 할 필요 없다는 의견이 모두 존재하는 상황이다. 서진호 행사팀장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원투펀치’로 기용할 연예인 한 두 팀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고 실제로 사회대 한 학생은 “폐막제 연예인 공연 빼곤 축제에 가본 적 없다”고 말했다. 반면 이현석 씨(의과대학·10)는 “서울대 축제에서 유명 연예인 공연이 빵빵 터지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대 축제는 한방으로 터지는 게 아니라 느슨한 맛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서울대 축제는 우리 손으로 일궈낸 우리만의 축제를 벌이자는 기치와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나가고 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직접 축제의 장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던 서울대 축제. 70여 년 동안 이어졌던 축제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온 서울대생의 시선이 담겨있다. 축제가 어떤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거나 목적을 달성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다는 점만으로도 축제를 들여다보고 가꿔나갈 이유는 충분하다. 매순간 당대 문화와 관심사의 척도가 된 축제, 앞으로 서울대 축제는 어떤 목소리를 담아 나갈까.

최근 10년 동안의 축제에 관해, 못다한 이야기

1.축제의 무대를 관악으로 넓혀가는 ‘관악씬’

서울대 안은 작은 음악 ‘축제’들로 넘쳐난다. 최근 10년 동안 다른 대학축제와는 달리 축제에서 연예인의 비중을 최소화하고 학내공연집단에 기회를 준 결과 자생적인 음악 콘텐츠가 샘솟게 된 것이다. 1999년도 봄축제부터 생긴 학내 밴드 릴레이공연 ‘따이빙 굴비’(따굴)가 그 시초다. 이 무대를 통해 ‘장기하와 얼굴들’ ‘9와숫자들’ ‘브로콜리 너마저’ 등 현재 국내 유명 인디밴드의 중심 멤버가 데뷔했다. 당시 따굴에서 만났던 이들 중 일부 인원이 의기투합해 ‘뺀드뺀드 짠짠’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냈고, 신림-봉천 지역 음악인들의 모임인 ‘쑥고개 청년회’를 형성했으며, 2005년 붕가붕가 레코드라는 레이블을 차려 인디음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도 ‘모반’ ‘나상현씨밴드’ 등 여러 학내 밴드가 국내 인디씬에서 주목받으며 관악을 알리고 있다.

서울대 축제 무대에서 공연을 시작한 사람들과 그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관악씬’도 생겨났다. 낙성대 ‘사운드 마인드’, 신림 ‘시간공장’은 학내 밴드들이 등장에 호응해 생겨난 공연장이다. 학내 음악 매거진 「샤우팅」 황운중 편집장(자유전공학부·14)은 “지역을 중심으로 공연장과 관객, 그리고 씬을 결성할 의지가 있는 팀들이 모여들어야 씬이 생성될 수 있다”며 “서울대 축제가 이런 원동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2.시위도 축제처럼, ‘본부점거’

2011년 6월, 서울대 법인화를 반대하며 학생들이 행정관 점거 시위를 벌였던 ‘본부점거’는 축하사의 정기 축제가 아니었지만 학생들에게 ‘축제’로 기억된다. 학생들은 법인화 날치기 통과를 비판하고 법인설립준비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는 재기발랄한 패러디 포스터를 행정관 벽에 붙였고 영상 ‘총장실 프리덤’을 찍는 문화운동을 벌였다. 분위기는 2,000여 명의 학생이 몰린 록페스티벌 ‘본부스탁’에서 최고조를 찍었다. 이 공연에는 ‘3호선 버터플라이’ ‘제리케이’ 등 많은 학내외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본부에 소통을 요구하고 법인화 풍자 메시지를 던져 떠들썩한 놀이의 장을 만들었다. 예컨대 ‘점거 장기화와 얼굴들’은 오연천 전 총장이 “경륜이 아직 부족하다”며 설립준비위에 학생 참여가 곤란하다고 말한 것을 풍자해 ‘경륜없이 산다’고 노래했다.

본부점거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참여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해 즐겼던 하나의 ‘축제’였다. 이현석 씨는 “점거투쟁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총장잔디에서 공연을 하고 행정관에 온갖 창작물을 걸어놓고 생활공간화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이벤트로 여겨져서 재밌었다”고 회상했다. 본부스탁을 이끌었던 강산 씨(종교학과·06졸)는 “축제 형식을 통한 문화 활동으로 권위의식을 깨뜨리는 과정이었다”며 “문화적 요소는 기존 정치 체제가 담아내지 못한 의견이 유일하게 표출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축제 형식을 통한 메시지 전달의 의의를 전했다.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사진 출처: 『대학신문 사진으로 본 서울대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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