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세르반테스 서거 40주년

▲ 김춘진 교수(서어서문학과)

올해로 세르반테스 서거 400주년을 맞는다. 세르반테스는 1547년 스페인 르네상스 중심 도시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나고 1616년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서거해 트리니타리아스 데스칼사 수도원 교회에 묻혔다. 1605년 『돈키호테』 첫 출간 후 10년 만에 속편을 출판하고 난 이듬해였다. 세르반테스의 생애는 스페인의 국운이 정점에 올라섰다 쇠락하던 흥망의 분수령에 걸쳐 있었다. 그의 삶은 스페인 부침의 역사만큼 극적이고 파란만장했다.

세르반테스는 1571년 스페인이 터키를 물리치고 지중해 패권을 차지했던 레판토 해전에 자원 참전해 용맹을 날렸다. 부상을 당해 왼팔을 잃었지만 이를 평생 영광의 상처로 자부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에 출정할 때는 군사물자 조달관으로 동분서주하며 조국의 승리를 애타게 염원하던 애국자였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국세 징수원으로 일할 때는 잦은 전쟁과 인구 감소로 국토가 황폐해져가는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1569년 스물둘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체류를 시작해 로마를 비롯해 여러 도시들을 두루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문명을 견문한 것이나, 1575년 나폴리에서 본국으로 귀환 중 해상 납치돼 알제리 포로 수용소에서 보낸 5년 동안 이슬람 문명을 체험한 것은 근대적 사유의 지평과 자유정신을 확장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지중해 세계의 코스모폴리탄으로 유럽과 아랍 아프리카 문명을 관통했던 생애 궤적은 세르반테스의 문학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전기적 배경이다.

세르반테스는 당대 거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섭렵했다. 소네트가 발달한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시인이요, 연극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극작가이기도 했다. 또 산문가로 목가소설, 기사소설, 비잔틴소설 등 로망스 장르를 다양하게 편력했다.

단연 돋보인 것은 소설가 세르반테스였다. 운문 연극 시대에 극작가로 출세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그만큼 타고난 불세출의 산문가요 소설가였음을 반증한다. 단 한 편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책으로 묶어내는 데 만족해야 했던 『여덟 편의 코메디아와 여덟 편의 막간극』 서문에서도 연극을 볼 관객이 아니라 읽어서 감상할 독자를 향해 작품의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관객에게 공연으로 호소하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산문적이었다. 자신이 스페인어 최초의 소설가라고 자부하게 만들었던 12편의 모범소설집은 이탈리아 노벨레 형식을 받아들여 한층 도덕적이면서 사실적으로 발전시킨 소설 실험이었다. 마침내 과거와 당대의 다양한 스토리텔링 양식을 실험하고 융합해 시대 변화를 통찰한 창의적 문학 지평을 열었다. 독창적으로 창조한 주인공 돈키호테의 방랑과 대화에 민담, 고전 우화와 노벨레 등 모든 형식의 이야기들을 망라해 녹여낸 서양 최초의 근대 소설 『돈키호테』를 탄생시킨 것이다.

『돈키호테』는 서양 근대를 풍미한 불후의 걸작이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많이 출판됐다니 책 중의 책인 셈이다. 책을 읽다 미치는 주인공도 문자 미디어로 열린 근대 사회를 그럴 듯하게 웅변한다. 책에 박식한 돈키호테와 구전 속담에 능통한 산초가 맞서 펼치는 풍부한 유머와 넘치는 재담, 그리고 수많은 일화들은 후대 문학과 예술에 무한한 사색과 영감의 원천이 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에 『돈키호테』만큼 심오하고 강렬한 것은 없으며 인간 사유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위대한 표현이라고 예찬했다.

『돈키호테』는 중세 기사 로망스를 패러디해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리얼리즘 소설의 효시로 꼽혀왔고, 오늘날 소설 이론 일반의 시금석이 됐다. 기사소설을 탐독하다 미쳐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 돈키호테 이야기는 기사소설의 진실성 결핍에 대한 풍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자로 소통하는 모든 이성중심주의 사상과 진리가 쉽게 교조적 믿음에 빠질 수 있다는 데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다. 『돈키호테』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진리/진실’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인쇄술 발명으로 도래한 활자 문명 시대에 언어에 갇힌 이성중심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세르반테스는 책의 세기를 웅변한 풍운아 에라스무스를 잇는 인문주의자로 빛난다.

『돈키호테』는 처음 출간되자마자 스페인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중세 편력 기사를 흉내 내는 복고적 돈키호테의 모험과 기행은 정신 나간 미치광이의 소극으로 읽혔다. 시대착오적 편력 기사 돈키호테의 희극을 이상을 찾다 좌절하는 보편적 인간의 비극으로 진지하게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낭만주의는 무한한 자연과 우주 앞에 유한한 인간의 왜소함을 대비시켰다. 중세 갑옷에 창과 방패를 든 시골 늙은이 돈키호테가 총과 대포로 전쟁하는 근대 사회에 정의를 세우러 나섰다 조롱당하는 이야기는 무한한 힘에 맞선 나약하고 무모한 인간의 모습으로 연민과 숭고미를 자아냈을 것이다.

그래도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는 돈키호테와 햄릿을 대비시키면서 우유부단하고 비전과 리더십을 결핍한 햄릿보다 뚜렷한 신념과 결단력을 갖고 희생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돈키호테가 더 공감 가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러시아 정교와 스페인 가톨릭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과 『돈키호테』를 러시아어로 옮길 만큼 스페인어에 익숙했던 지적 배경이 그렇게 판단하는 데 한몫 했을 것 같다. 어쨌든 투르게네프 이후 돈키호테는 무모하고 저돌적으로 치기 어린 인물보다는 오히려 행동하는 실천력을 갖춘 지성과 정의의 보편적 상징 인물로 더 사랑받아왔다.

온통 기술 혁명과 정보화로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는 오늘날 『돈키호테』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새로운 숙제다. 어느 때보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강조되는 시대에 『돈키호테』에 대한 해석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빛나야 할 때다. 일상 문화와 전통을 바꾸고 재창조하는 것이 미덕인 요즈음 상식을 뛰어넘는 모험과 기상천외한 편력을 즐기는 낭만적 의미의 돈키호테 정신은 더없이 흥미로운 생각거리다.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초연결 시대에 최고의 화두가 소통과 공감이라는 사실도 상기해볼 일이다. 돈키호테와 산초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로 맞서는 가운데도 대화와 우정을 나누고 고락을 같이 하며 서로 닮아가는 이야기는 소통과 공감으로 인간적 유대를 실천하는 휴머니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돈키호테』가 초연결 정보화 문명을 살아가는 21세기 현대인들에게도 값진 고전일 수 있는 이유다. 인간과 사물이 하나가 돼가는 포스트인본주의 세상에서도 왜 사유의 중심은 인간이어야 하고 어떻게 우리를 둘러싼 생태적 환경과 소통하며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지는 언제나 곱씹고 발전시켜야 할 성찰의 과제인 것이다.

왜 하필 돈키호테는 스페인에서 탄생했나? 서양 근대 문명과 인문주의를 웅변하는 『돈키호테』가 17세기 들어 네덜란드와 영국 등 신흥 근대국가들에 뒤쳐지고 있었던 스페인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스페인은 종교개혁에 대항종교개혁으로 맞서며 근대사에 거스르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가늠하는 불후의 걸작이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빛이 강해야 그림자도 짙듯이 말이다.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고 종교개혁과 대항종교개혁이 맞서는 한편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고 유럽 문명과 아메리카 문명의 접속이 이뤄지면서 전환기 역사의 명암이 극명하게 드리우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양 근대사의 획을 긋는 이정표적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역사의 분기와 문명 충돌 그리고 문화 혼종이 일어나는 곳에서 위대한 문화도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무적함대를 물리쳐 스페인을 제치고 강력한 근대 국가의 선두 대열에 나서면서 가보지 않았던 새 길을 가야 했던 영국에서 햄릿처럼 생각과 셈이 깊고 우유부단한 인물이 창조될 수밖에 없었다면, 반대로 절정에서 쇠퇴로 전락하던 스페인에서 과거 영광의 향수에 젖은 복고적 이상주의자 돈키호테가 탄생한 것도 역사의 필연처럼 그럴듯해 보인다.

그만큼 돈키호테는 소설의 허구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세르반테스 시대 스페인인들의 자화상이었다. 600명이 넘게 소설에 등장하는 당대 스페인의 인물 군상들은 제각기 어딘가 돈키호테와 닮아 있다. 정복한 나라의 영주를 시켜주겠노라는 정신 나간 돈키호테의 믿기지 않는 약속을 믿고 고난의 방랑길을 따라나선 산초도 그렇다. 실제 역사적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판테온과 수도원을 겸한 불가사의한 왕궁 엘 에스코리알의 작은 방에 늘 검은 옷을 입고 칩거하면서 레판토 해전과 무적함대를 문서로 지휘했던 지나치게 ‘신중한 왕’ 필립 2세가 그렇고, 기사에서 성직자로 전향해 예수회를 창설하고 교황의 친위대를 만든 전투적 성인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도 돈키호테 커리커쳐가 어울린다. 모함과 사기로 두 번 옥살이를 하고 일생 가난하고 불행했으면서도 누구보다 낙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세출의 문장가로 기사소설을 풍자하면서도 문예 못지않게 기사도를 동경하고 무예를 숭상했던 문인 세르반테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위대한 작가의 탄생이나 서거 주기를 기념하는 것은 업적을 기리고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화의 현실을 되돌아보고 미래의 도약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다. 이미 『돈키호테』 2편 레모스 백작에 바치는 헌사에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출판을 제일 간절하게 기다리던 중국 황제가 사신을 통해『돈키호테』로 스페인어를 가르칠 대학 총장을 맡아달라는 친서를 보내왔다고 쓰고 있었다. 『돈키호테』를 세계의 고전으로 꿈꾸는 농담도 흥미롭고 미래의 세계화를 내다본 선견지명도 돋보인다.

21세기에는 어떤 세르반테스가 등장하고 어떤 미래를 꿈꿀지 궁금하다. 디지털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문주의적 인간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드는 요즈음 4차 산업혁명 시대 세계인의 초상을 어떻게 그려낼지 생각해보게 된다. 또 21세기 한반도의 문학과 예술이 그려내는 우리들의 초상은 어떤 것일까? 지정학적으로 강국들에 둘러싸여 늘 협소하고 위축된 상황에 응전해온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부강한 시대를 맞이하고 국력 성장을 바탕으로 한류 세계 문화를 창조한다는 자부심에 들뜬 마당이다. 다양한 문명이 충돌하고 역사가 바뀌던 17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처럼 21세기 동서 문명이 충돌하고 접속하면서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역동적 한반도야말로 창의적 문화가 꽃피는 또 하나의 중심일 수 있겠다. 세르반테스 400주기를 추모하는 지금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한반도에서 세르반테스를 잇고 이를 넘어서 세계화를 웅변하는 위대한 작품과 영웅이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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