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매일매일은 공사다망하고, 그 와중 기억할 날들은 많기도 해라. 5월 달력을 펴놓고 보니, 근로자의 날부터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까지, 나라에서 정해준 이런저런 날들만해도 벌써 한가득이다. 저 날들이 제 나름 기억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처럼 화기애애하고, 상점가는 매대를 선물로 잔뜩 채우며, 방방곳곳 행사가 한창이겠다.

기념일들. 이 날들은 누군가에겐 수줍은 마음을 전할 마침맞은 기회이며, 또 누군가에겐 잊고 지낸 무엇인가를 잠깐이나마 떠올리게 해줄 다행스런 보루가 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렇게 훈훈하게 여길만한 것도 아닐듯하다. 기실 기념일을 열심히 챙겨야한다는 것은, 참 당연한 것들을 도대체들 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저 날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쩌면 ‘잊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여기, 많은 사람들이 기념일을 맞이하여 어색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미안합니다, 이제는 잘 할게요, 다시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민망스레 건넨 이 약속이 곧이곧대로 실행만 된다면야 여지없이 다행인 일이겠다만, 속수무책 바쁘게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실패하고 더없이 부끄러워진다. 결국 몇 번의 낭패를 겪은 다음에는 아예 이렇게 슬쩍 믿어버릴까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저 기념일들은 애초부터, 자꾸만 무뎌져가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우리의 망각의 시간들을 변명하기 위한 정례적인 재판정이라고. 달리 말하자면, 가끔씩 부끄러워질지라도 너무 염려마시길, 우리에겐 스스로를 변호할 법정이 매년마다 돌아올 것이니, 운운하는 자기 위안.

그러나 어디, 4월에 대해서라면, 예컨대 4‧3과 4‧19, 김세진과 이재호, 육우당의 날들에 대해서라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도무지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할, 망각의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는, 그런 날들도 있다는 사실을, 내겐 이미 4월의 ‘그날’이 알려준 바 있다. 작년 그날처럼 어김없이 내린 비가 질책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날을 매일매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으니. 그날 그 시간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그래서 730번째 그날을 맞고 있다는 이들을 앞에 두고, 대체 어떤 자기변호가 가능했겠는가.

▲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곧,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은 조금은 더 저들과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이런 방식. 한 철학자는 기념일, 곧 기억의 날을 설명하면서 “돌아오는 날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날”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때 그는 말 그대로 그 순간을 ‘똑같이’ 겪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일화를 덧붙인다. 프랑스의 7월 혁명 당시, 파리 곳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느 누구의 지시도 없이 제각기 시계판에 총을 쏘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 그렇게 했을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정말 그 순간, 그 한 순간을 붙잡으려던 것은 아니었던가.

분명, 이런 식으로 그날을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 역시 다시 그 순간을 살자는 것, 무뎌지지 않고 흐려지지 않은 그때의 슬픔을 아직은 간직하는 것일테다. 그러하니 나는, 우리가 다만 그날을 맞이하여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그 어떤 날들을 똑같이 살기를 소망한다. 이를테면 봄꽃이 피고 바람이 불때마다, 비가 오고 날이 맑고, 사소한 일로 울고 웃을 때마다, 지난날을 가늠하고 앞일을 계획할 때마다, 그 어느 순간에 내 귀에 그리고 당신의 귀에 갑자기 총성이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과거 어느 순간의 시계를 멈춰 세우듯, 불현듯 그날의 충격이, 그날의 통증이, 깜짝하고.

 

백수향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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