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

어떤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던 간에,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 철저한 ‘실패’로 귀결됐으며, 그로 인해 혁명에 대한 거대한 ‘환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과제가 간단명료하게 성취될 수 있는 과제임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화대혁명은 여전히 그것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며 등장했던 몽롱시의 시구들만큼이나 모호하고 난해하다. 더구나 그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목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그것의 ‘실패’와 ‘환멸’로 인해 누가 열매를 얻었고(혹은 현재 그 열매를 누리고 있고), 누가(그리고 무엇이) 좌절했는지는 그야말로 모호하며, 때문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1956년 흐루시쵸프가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행한 비밀보고 내용이 알려지면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던 당시 모택동의 반응 중에는 자못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탈린의 문제를 스탈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스탈린의 ‘시대’의 역사적인 문제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발언의 배경에 어떠한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었든지 간에, 이 관점 자체는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 수많은 역사적 문제들을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몰아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야 수지가 맞는 속편한 처리방식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문화대혁명 50주년을 맞은 오늘날, 문화대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기술을 위해 다시 한 번 되새겨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의 수많은 오점들을 모택동 개인과 떼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공허한 만큼, 그 모든 오점들의 원인을 모택동 개인에게로 돌려 버리려는 태도 역시 기만적이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 1967년 무장투쟁이 진행되던 시기 무한 지역의 조반파*가 제작하 포스터. 무한 지역의 핵심 권력자였던 진재도를 타도의 대상으로 적시하고 있다.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우리가 흔히 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문화대혁명이 중국이라는 이 미묘하고도 거대한 나라 전체의 10년이라는 긴 세월의 역사 전체를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과정 속에서 당시 중국의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각색을 나름대로 부지런히 소화해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분기적 인식을 요구하는 수차례의 곡절들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무대 위의 각색들은 대담하면서도 미묘한 변신을 거듭했다. 모택동은 이 오랜 기간에 걸친 대하드라마의 연출자이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역시 상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소화해 낸 인물의 하나로 만족해야만 했으며, 그 드라마가 완전히 막을 내릴 때까지 무대에 남아 있지도 못했다.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모택동에 대한 평가나 서술과 분명하게 분리돼야 할 필요가 있다.

▲ 혁명 이전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선전물.

물론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역사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확인이 필요 없는 명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명제가 문화대혁명이 중국‘만’의 역사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화대혁명이 중국만의 역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근원과 전개 과정에는 60년대 중소 논쟁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른바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과 전후 세대가 주도하는 청년 운동의 전면적 대두 등이 다각도로 연관돼 있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차원이다. 다만 이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에 속하므로 이 자리에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적 연구와 관련돼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차원이다. 그것은 문화대혁명을 낳은 (그리고 그것의 이상과 관련돼 있는) ‘문제 의식’의 보편성과 관련돼 있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역사인 이상 그것은 명확한 중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 초기의 운동 속에서 표현된 대중들의 도시적 열광 저변에 깔려 있었던 ‘불만’과 ‘문제의식’의 내용과 색채들은 (약간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대체로 1960년대와 70년대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던 반체제적 운동의 주체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몇 가지 주요한 ‘불만’들과 강한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운동들을 아울러 ‘문화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문화혁명’의 개념은 중국의 문화혁명으로서 ‘문화대혁명’이 지니고 있는 세계사적 의의와 위상, 그리고 그 한계를 되짚기 위한 보다 생산적인 평가적 지표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여타 국가들에서 발생한 일련의 반체제적 운동들 사이의 관계를 일방적 영향관계로 파악하고자 하는 유혹에 많이 노출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국사적’ 범위에 가두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 북경 지역의 조반파 홍위병들이 제작한 목판 선전물. 당내부의 당권파들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있다.

근대 국가의 건설 과정(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도시 중심적인 산업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대하고 폐쇄적인 관료 기구의 성장 및 전문가적 기술주의로의 경도, 그리고 역시 그로 인해 촉진되는 사물화된 권위주의적 분업 체계와 그 체계 속의 불평등 등은 결코 중국만의 문제도 사회주의 사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비록 각각의 사회마다 그 모순의 표현 형식이 다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저항의 방식들도 서로 달랐지만 그 운동들 모두는 근대적 산업화 과정(및 그 결과)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대한 회의와 한 걸음 진전된 ‘인민 주권’의 실현에 대한 역사적인 욕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회의와 욕망은 중국에도 있었고, 프랑스에도 있었으며, 서독과 동구에, 그리고 미국과 중남미에,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20세기 후반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문화혁명’의 중요한 한 지절(枝節)로서 고찰돼야할 필요가 있다. 문화대혁명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이방의 역사가 아니다.

▲ 혁명 정신의 세대적 전승을 강조하는 선전물.

만일 중국적 특수로서의 문화대혁명이 20세기적 보편으로서의 문화혁명의 한 지절이라는 관점을 인정한다면,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근원은 1966년 전후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의 특수한 (따라서 엄밀하게는 ‘우연성’의 영역에 속하는) 문맥을 넘어선 지점으로부터 탐색돼야 한다. 이른바 ‘문화대혁명 10년(66-76)설’은 그 기간 동안 핍박과 억압을 당해 왔던 지식인들의 경험적 사실에 합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문화대혁명의 진정한 기원과 실제 전개 과정을 본의 아니게 은폐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결코 특정한 개인의 의지나 개별적이고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66년 이후 지속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구호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문화대혁명과 70년대 문화대혁명이 동질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중국에서의 문화혁명은 56~7년에도 있었고, 66~7년에도 있었으며, 80년대의 시작과 끝에도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군대가 주도하는 혁명위원회(三結合)가 대중의 정치적 분출을 통제하고, 그마저도 부활된 당 위원회의 집행기구로 전락해 버렸던 70년대 중반 중국 사회에서는 그 어떤 문화혁명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문화대혁명 50주년을 맞는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서는 어떠한가? 문화혁명의 기운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일 오늘날의 중국에 문화혁명의 기운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니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인가?

 

*조반파(造反派): 문화대혁명 당시 노동자·농민 등 비지배계층 출신 자녀들로 구성된 홍위병. 혁명파로도 불리며 모든 기득권에 강력히 저항하며 극좌적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했다.

사진제공: 성근제 교수

▲ 성근제 교수(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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