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

나의 삶은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화가능(justifiable)한가? 철학자 T.M. 스캔런의 계약주의(contractualist) 이론은 이 질문을 인간 상호작용의 핵심으로 본다. 스캔런은 내가 선택한 삶이나 행동을 다른 이들에게 정당화할 수 없다면, 이는 무척 고통스러운 상황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른 이들’이 이미 친밀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비행 중 착륙할 일 없는 나라라고 해서 쓰레기를 비행기 밖으로 던지거나, 방문할 일 없는 나라라고 해서 그리로 유해물질을 보내는 게 괜찮을 리 없듯이, 내 행동으로 영향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디에 있는 누구든 내 행동을 그에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스캔런의 생각이다.

스캔런이 상정하는 정당화가능성의 동기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이 동기의 작동을 흔히 목격한다. 타인의 불편과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처사를 비판하는 인터넷 풍경에서 씁쓸하게 확인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불편이나 고통을 주지 않고자 스스로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는 주위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찾기도 한다.

서울대, 말하자면 풍족하게 자란 학생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출생의 우연으로 뛰어난 학습능력을 타고난 학생 비율은 늘 높은 이곳에서도 정당화가능성의 동기를 종종 본다. 가령 최근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알게 된 후 “무엇이라도 해 보고 싶은”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학생 모임이 그렇다. 교수진이 간혹 접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덕에 서울대에 왔는데, 그런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닌지”, 요컨대 자신의 출생 배경 덕에 얻은 사회적 이득이 온전히 자신의 몫은 아니라고 믿는 학생들의 고민도 그러하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또는 불리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또래가 가족이나 친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도덕 공동체(moral community) 구성원에게 정당화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고민하고 행동한다.

이처럼 정당화가능성의 동기를-내지는 정당화 불가능성의 고통을-느낄 수 있음은, 삶의 나침반이 있다는 희소식이기도 하다. 물론 나침반을 찾았다고 해서 정당화가능한 삶이 정확히 어떤 삶인지 쉽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계약주의 규범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지는 스캔런의 도덕 동기론을 받아들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한 연구영역이고, 각 개인의 일인칭적(first-personal) 고민이 간단히 해결되리라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더욱이 (위에서 암묵적으로 전제했듯이) 우리의 도덕 공동체가 궁극적으로는 인류 공동체라면, 국경을 넘어 공동체 구성원 각각에 정당화가능한 규범을 찾는 건 당연히 어려운 작업일 테다. 염두에 둘 점은, 정당화가능성의 동기를 실현하고자 불확실하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 불확실성이 골치 아파서 복잡한 현실에 편리하되 허구적 단순함을 덧씌워 사는 삶, 그리고 이 모든 게 버거워 정당화가능성의 동기 자체를 버리는 삶은 각각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란 것이다.

역시 계약주의 철학자인 존 롤스는 역작 『정의론』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영원의 관점이란…합리적인 사람들이 현세에서 취할 수 있는 어떤 사고와 감정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방식을 취함으로써…모든 개인 시각을 하나의 틀로 모아 모두가 각자의 견지에서 긍정하며 따를 수 있는 규율에 도달할 수 있다. 마음의 순수성(purity of heart)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관점에서 품위와 자제력을 지닌 채 선명하게 보고 행동하는 경지일 테다.” 몹시 추상적이라 바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감동적인 선언이다. 감동의 원천은 아마 선언에서 드러나는 상호 정당화가능성의 중요성,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지금처럼 살아도 되는지,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할 때, 막막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설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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