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는 도널드 트럼프가 막말과 기행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논란을 일으킨 트럼프의 태도는 이민자와 무슬림을 비하하는 언행에서 드러난다. 그는 멕시코인과 무슬림을 범죄자로 규정하며 그들을 미국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놓았다. 이런 트럼프의 태도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이민자와 무슬림을 희생양으로 삼는 그런 정치의 출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트럼프의 지지율은 높고, 트럼프가 비하한 히스패닉계의 지지도 식을 줄 모른다.

무고한 희생양을 죄인 취급하는 트럼프의 태도는 한국 사회에서도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노동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집단 따돌림 현상은 학생 사회를 넘어서 직장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나 장애인, 고아에 대한 시선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 차갑기만 하다.

이와 같이 무고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상이 인류 문화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 사상가가 있다. 지난 11월 세상을 떠난 르네 지라르는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인 폭력이 과거부터 내려온, 사회를 유지하고 문화를 만드는 메커니즘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와 같은 집단적 폭력에 우리 자신이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라고 말한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됐고 ‘인문학의 다윈’이라 불렸던 지라르. 『대학신문』에서는 이번 기획에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의 회복을 말하는 지라르의 이론을 살펴본다.

 

여러 학문을 파고들게 한 변방의 체험

신영복은 그의 마지막 강의를 담은 『담론』에서 변방성에 대해 말한다. 중심부는 기존 가치를 지키는 제도권의 공간이다. 기존의 질서만을 고수하는 공간은 창조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고착화된다. 그러므로 신영복은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했듯 변방성은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가치의 전환을 일으켜 우리에게 새로운 진실을 보여준다.

르네 지라르는 이와 같은 변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학자다. 1923년 프랑스 남부 아비뇽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라르는 어린 시절 프랑스 내에서 남부 출신을 깎아내리는 정서를 경험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그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물결에 저항한 소수의 기독교 노동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타국인으로서 고충을 겪었고, 전공인 역사학과 관계없이 문학 교수가 됐다. 이렇게 지라르는 일상적 체험들로부터 변방에 위치한 소수자의 입장을 겪고, 다수의 차별과 억압을 직접 체험했다.

이런 변방인의 체험은 지라르가 변방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문학, 인류학, 종교학 등 여러 학문의 서로 다른 텍스트를 섭렵하며, 하나의 학문과 제도권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자기 전공 이외의 다른 학문을 독학으로 공부함으로써 지라르는 자신의 학문을 확장시키고 기존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이론을 발명할 수 있었다. 그는 문학에서 연구를 시작했지만, 신화와 종교 텍스트 같은 인류학 자료까지 분석하면서 폭력을 문화와 연관 짓는 이론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모방적 욕망으로 인한 갈등의 발생

문학 교수였던 지라르는 소설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에게 소설은 인간을 탐구하는 하나의 ‘과학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설에 대한 분석을 실제 현상들과 연결시키려고 했다. 그로 인해 지라르가 다수의 소설 속에서 주목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촉발하는 욕망이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인물의 욕망이 어떤 모습을 띠는지에 가장 관심을 가졌고, 이를 통해 서로의 욕망끼리 맞부딪혀 생기는 갈등에 관한 이론을 정립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욕망이 자발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란 어떤 대상을 원하는 감정으로, 사람은 보통 자신이 진심으로 명품이나 돈을 욕망한다고 생각해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근대적 세계관에서 본 욕망은 단순히 ‘나’라는 주체와 대상 간의 직선적, 일차원적 관계를 띤다. 근대 사람들은 사람이 타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욕망만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욕망은 개개인이 선천적으로 갖는 특성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라르가 여러 소설을 읽으며 발견한 인간의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욕망은 타인과 관계되는 것, 즉 모방적이라는 답을 내렸다. 그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은 주체에서 대상을 향하는 직선 형태가 아니라, 주체와 타인 그리고 대상이 참여하는 삼각형 형태라고 말했다. ‘욕망의 삼각형’은 주체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체는 타인이 소유하거나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한다. 김석 교수(건국대 융합인재학부)는 이를 “욕망이 선천적 본능이 아니라 타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기사가 되기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돈키호테는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의지가 아니라,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가 하는 행동을 신실하게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한다.

다른 철학자들도 “인간이 모방을 통해 교육을 받는다”는 등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지만, 그들의 논의는 모방을 하나의 단편적인 현상으로 분석하는 데 그쳤다. 지라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 모방적 욕망이 인간에게 원초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사회적 경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져 차이가 없어질수록 주체와 타인이 경쟁한다. 돈키호테는 아마디스와 거리가 멀어 만날 일이 없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적극적으로 아마디스를 찬양하고, 그를 모방하겠다고 드러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는 동등한 욕망을 지닌 두 사람, 드 레날과 발르노가 만나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드 레날은 자식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발르노가 가정교사를 고용할 거라는 생각에 먼저 가정교사를 고용한다. 드 레날은 자신이 발르노를 의식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주체는 자신이 타인을 모방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타인을 이기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이런 경쟁 관계는 타인도 똑같이 주체를 모방하게 만들어서 경쟁을 격화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기존 학자들과는 다른 욕망의 구조를 밝혀 공감을 얻은 지라르는 소설 속 분석을 현실로 확장시켰다. 그는 실제 사람들도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적과 흑』의 주인공들처럼 갈등한다고 봤다. 김진식 교수(울산대 프랑스어프랑스학과)는 지라르의 분석이 “사람들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니라 가깝기 때문에 폭력이 난무한다는 통찰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생겨난 개인 간의 경쟁은 제3자가 또다시 모방해서 다른 개인에게까지 전염된다. 욕망은 계속해서 모방돼 사회 전체에 경쟁이 격화되고, 심각한 경쟁으로 인해 갈등도 함께 전이된다. 사회 전체에 갈등이 만연해지면 사회의 존립에 위기가 올 것이고, 이런 갈등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어딘가에 있어야만 했다. 여기서 지라르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메커니즘이 있다고 봤고, 이는 문화의 기원을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

 

문화를 만드는 폭력에 주목하다

문화의 기원을 더욱 자세히 연구하기 위해 지라르는 소설에서 벗어나 인류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인류학을 혼자 공부하며 갈등과 위기의 해결방법에 대해 고민한 그는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 폭력이 사회를 유지한다는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경쟁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은 본래 욕망하던 대상을 잊고 경쟁자를 향한 증오에 사로잡혀,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만 노력한다. 경쟁자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에게 증오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희생양이 된 그 사람의 책임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큰 것은 아니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은 희생양에게 전적으로 죄가 있다고 여긴다. 군중은 서로의 증오를 모방하며 모든 위기의 책임이 희생양에게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이렇게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한 군중은 평화를 되찾는다. 지라르는 『문화의 기원』에서 모든 사회의 출발점에는 이와 같은 폭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있어야만 사회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고 질서를 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양을 통해 찾아온 평화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에는 다시 모방에 따른 갈등과 위기가 나타나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주기적으로 갈등과 위기를 통제해야만 한다. 원시인들은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온’ 기억을 떠올려서,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려고 한다. 이 때 원시인들은 대체된 희생물을 만들어서 그것이 첫 희생양처럼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대체된 희생물을 죽임으로써 사회는 처음의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한 것과 똑같이 갈등을 해소한다. 지라르는 이 때 처음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대신하는’ 상징작용이 생긴다고 말했다. 뇌에서 상징영역을 사용하게 된 인간은 다른 요소들에도 상징을 적용하면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었고, 그 결과 복잡한 인식을 수행하면서 언어나 고차원적인 제도를 만들게 됐다. 정일권 초빙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는 “최근 언어학자들은 이처럼 희생양에 언어의 기원이 있다는 지라르의 이론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문화 전체가 제의에서 유래했다는 지라르의 가설은 문화의 기원과 관련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에는 문화란 인간의 합리성이 생겨난 이후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이 대세였다. 따라서 문화는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류가 이성적으로 개발한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였다. 이와 달리 지라르는 금기와 언어, 기타 문화 제도가 모두 희생양에 대한 폭력과 그 부산물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제도권 학자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정일권 교수는 “지라르의 말은 인류의 기원이 상당히 폭력적이라는 것”을 부각한다면서, 지라르의 문화에 대한 해석이 인류 문화의 비이성적 측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지라르는 신화 역시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숨기고 제의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텍스트로서 새롭게 해석했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신화 『오이디푸스 왕』에서 역병이 유행한 뒤 오이디푸스는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지라르는 비극에 나온 역병이 모방적 욕망과 그에 따른 사회의 위기를 만들고, 오이디푸스가 그 사회의 희생양이 됐다고 해석했다. 오이디푸스에게 사회의 위기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그는 어떤 변명도 없이 추방을 받아들인다. 이는 소포클레스가 군중의 입장에서 신화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신화는 가해자의 입장과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각에서 쓰여서 희생양을 죄인으로 묘사한다. 군중은 신화를 통해 희생양의 무고함에 대한 자각 없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화 해석은 당대 인류학을 주름 잡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해석과 달라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나타나는 중요한 내용들의 관계를 언어구조적으로 분석해서, 신화가 현실의 모순을 수용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지라르는 신화에 피비린내 나는 희생제의가 숨겨져 있다고 봤고, 그에 따라 신화를 사회와 연관짓지 않은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을 비판했다. 정일권 교수는 “레비스트로스가 프랑스 학술원의 회장에 있을 때 그가 반대해서 지라르가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신화와 성경의 대비에서 자유를 모색하다

원시 사회에서 제의가 사회를 유지하고 문화를 만든 것과 달리, 지라르는 현대 사회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현대인들은 집단 따돌림이나 무고한 사람을 죄인 취급해 마녀사냥하는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기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인류 문명에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화만 전달돼왔다면, 사람들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을 지금까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대비되는 다른 텍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현대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폭력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던 단초를 종교 텍스트에서 찾았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류는 기독교를 통해 자신의 폭력을 인식함으로써 문화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구약의 요셉 이야기를 대조하며, 신화와 기독교 텍스트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요셉은 어린 시절 가족에 의해 추방된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와 같다. 그러나 희생양인 요셉은 오이디푸스와 달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야기 말미에 요셉이 자신을 추방시킨 형제들에게 보복하는 것도 합당한 결과로 서술돼 그의 무고함을 증명해준다. 이처럼 성경은 희생양의 입장에서 군중의 폭력을 묘사하고, 그것을 사탄, 카인 등으로 묘사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성경이 희생양의 무고함을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폭력과 욕망에 대해 처음으로 반성하고 문화의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정일권 교수는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가 사람들을 탈신성화시켰다고 본 것”이라며, 지라르가 기독교를 계몽적인 텍스트로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지라르는 현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를 다시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모방적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기 쉽다. 경쟁이 심각해지면 사회 전체가 위기에 빠지므로 사회는 한 사람에게 폭력을 집중해 그를 희생한다. 지라르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가 발전하려면 이와 같은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끊어야 한다고 봤다. 사회 구성원들은 무고한 사람이 집단적 폭력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객관적으로 희생양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라르는 우리가 집단적 폭력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자기 내부의 모방적 욕망을 직시해,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경쟁하려는 마음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의 기원을 파고들어 폭력의 메커니즘을 찾아낸 지라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폭력을 없애야만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고한 소수에 대한 폭력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문화의 기원을 밝힘으로써 폭력의 해결책을 제시한 지라르도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현대 사회에 대한 지라르의 분석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실제로 그의 이론은 원시 사회에 대한 분석이 주가 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복잡한 현대사회에 그의 이론을 적용하기는 무리라고 입을 모은다. 이는 그가 갈등과 폭력의 해결책으로 예수를 모방해야 한다는 단순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이유기도 하다. 김석 교수는 “지라르가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는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도 많이 작용했다”며 대안적 측면에서 너무 단순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내비쳤다. 다른 학자는 지라르가 지나치게 기독교를 옹호하며 종교적 색채를 띤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라르 연구가들은 그의 기독교 옹호를 인간의 폭력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독교 옹호는 욕망과 희생양의 구조로써 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전체 이론에 비하면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진식 교수는 “지라르가 너무 기독교를 옹호한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국한해 볼 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사상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폭력과 갈등을 보다 더 넓은 층위에서 볼 기회를 준다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지라르는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멸시와 비난을 다르게 볼 기회를 준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는 도널드 트럼프는 이민자와 무슬림을 비하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트럼프는 멕시코인과 무슬림을 범죄자로 규정하며 그들이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놓았다. 이런 인종모욕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지지는 굳건하기만 하다. 트럼프 지지 현상의 이면에는 미국 경제나 사회적 유동성, 계층 간의 갈등 등 복잡한 원인이 있다. 지라르의 이론은 이 현상을 분석하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준다.

CNN 정치평론가 출신인 빌 슈나이더 교수(미국 조지메이슨대 정치학과)는 그에 대한 지지가 이민자, 종교적 소수자, 동성애자, 싱글맘 등 변방에 위치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전통적인 기성 가치를 수호하는 골수 보수파로부터 나온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지라르의 이론으로 슈나이더 교수의 분석을 재조명할 수 있다. 트럼프의 소수집단 배척 논리는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하는 군중의 논리와 유사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무고한 이민자와 무슬림을 죄인 취급하며 자기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과거의 미국’(Old America)을 동경한다.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원시 사회의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사회 결속력을 다지고 갈등의 에너지를 배출하려는 폭력의 가해자다.

더 나아가 멕시코인을 비하한 트럼프를 히스패닉계가 지지하는 현상도 지라르의 모방적 욕망으로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멕시코 이민자들은 멕시코 이외 지역 출신의 히스패닉계에게 직업이나 복지 측면에서 또 다른 경쟁자다. 그들에게 멕시코 이민자는 자기가 욕망하는 대상을 얻는 데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다. 지라르의 이론은 소수자를 배척하는 트럼프의 논리에 숨겨진 폭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의 모방적 욕망을 다시금 통찰하게 해준다.

트럼프의 희생양 논리는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아직까지도 학생 사회나 직장 사회에서는 집단 따돌림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실제로 잘못이 있다고 간주하고 그를 따돌림하며, 자기들만의 유대감을 키운다.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 ‘큐이즈’의 새내기 현수막을 찢어놓는 행위도 소수에 대한 멸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증오는 집단 내에 존재하는 모방적 욕망과 그로 인한 갈등의 에너지를 배출함으로써 중심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유대감을 키우려고 한다.

모방적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무고한 소수에게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 지라르는 이렇게 폭력 구조의 근원을 찾아 해결책을 말했기 때문에,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성찰하라는 그의 외침은 현대 사회에도 유효하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그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됐고, ‘인문학의 다윈’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세계적으로 매년 국제지라르학회인 ‘폭력과 종교에 관한 콜로키움’에서 다양한 학자들은 그의 외침을 적극적으로 적용하려고 한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을 저지르기 전에, 한국 사회는 폭력과 욕망의 본 모습을 성찰하라는 지라르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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