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출간 500주년

▲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금부터 500년 전인 1516년 출판됐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당시 잉글랜드의 모순적인 상황을 이렇게 서술한다.

양들은 언제나 온순하고 아주 적게 먹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양들이 너무나도 욕심 많고 난폭해져서 사람들까지 잡아먹는다고 들었습니다. 양들은 논과 집, 마을까지 황폐화시켜 버립니다. 아주 부드럽고 비싼 양모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대귀족과 하급 귀족, 심지어는 성무를 맡아야 하는 성직자들까지 옛날에 조상들이 받던 지대에 만족하지 않고 목축을 위해 울타리를 쳐서 막습니다. 경작과 수확을 위해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던 그 땅에 가축을 풀어놓은 이후에는 한 명의 양치기면 충분하게 됐습니다.

직물업의 성장으로 양모 수요가 늘고 가격이 급등하자 지주 귀족들은 농민들을 내쫓고 넓은 농지를 목장으로 만들어 양을 치게 됐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가서 비참한 빈민 생활을 하다가 흔히 범죄자가 되고, 또 많은 이들이 체포돼 처형당했다. 어느 날인가는 런던 시내의 교수대에 무려 20구의 사체가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지옥의 살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순박한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사실 누명을 쓴 양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지주 귀족들이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대신 다수가 최악의 빈곤으로 몰리는 이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가? 이런 상황을 목도하고도 무심한 채 살아간다면 지식인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당대 최고 지식인이며 실천적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가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책이다.

세상에 만연한 불행의 근본 원인은 탐욕과 자만이다. 헛된 욕심이 세상을 이토록 어지럽혔다.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미친 욕구, 그리고 그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는 화폐가 주범이다. 이 상태라면 세상에 행복은 불가능하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유토피아』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으면 화폐를 없애고, 아예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아무 데에도 없는 나라’, 곧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곳 주민들은 과연 행복한가? 모어의 실험적 관찰을 따라가 보자.

행복은 쾌락의 충족을 통해 이뤄지며, 또 쾌락은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으로 나뉜다. 육체적 쾌락은 음식을 잘 섭취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고 반드시 충족돼야 하지만, 물론 이 수준의 쾌락만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정신적 쾌락이 필요하다. 모어의 말을 직접 옮기면 “지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관조로부터 오는 즐거움, 또는 잘 보낸 한평생을 되돌아볼 때의 만족이나 장래의 행복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희망”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쾌락은 이 단어가 주는 어감과는 달리 무절제한 향락과는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육체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덕성을 기르는 이 두 가지 사항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노력해 달성한 곳이 유토피아다. 우선 모든 시민이 하루 6시간 노동을 하면 생존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일하자는 주장은 실로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라의 기본 원칙은 공동 소유, 공동 노동, 공동 분배다. 이 점만 보면 모어가 마치 공산주의의 원조 사상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더 중요한 상위의 정신적 쾌락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하루 6시간 노동은 안정된 식량 확보와 동시에 여유 시간을 뜻한다. 먹는 문제에 매달려 하루 종일 짐승처럼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한다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한 사항일 수 있다.

이 나라의 철학은 집단적인 행복 추구다. 나의 행복은 우리 모두의 행복 속에 녹아 있다.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해서 전체의 조화를 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사회의 실상은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공화국의 덕을 강제하는 것이리라. 외부인이 이 나라를 찾아가 보면 온 국민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고, 똑같이 생긴 도시에서 똑같은 집에 살고 있으며, 모두 구민회관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질겁할 것이다. 허락 없이 자기 거주지를 벗어나 여행을 하다 적발되면 범죄자가 되고, 만일 재범인 경우에는 사형을 피할 수 없다. 혼외정사를 벌이다가 잡히면 노예 신분으로 떨어지고, 이 역시 재범인 경우 사형에 처해진다. 덕성스러운 이상국가는 동시에 최악의 감옥국가다. 어쩌면 이 나라 수도 아마우로툼에도 교수대에 스무 명의 탈주범 사체가 매달릴지 모른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는 분명 이 세상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소망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이상향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가혹하고 부조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도 놓치지 않는다. 이 점이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유토피아』를 읽는 최악의 방법은 여기에 그려진 사회가 저자가 그리는 이상사회의 청사진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곳에서 이 나라가 문자 그대로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며 심각한 모순을 껴안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책을 읽어갈수록 저자의 본의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급기야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독자들을 경악시키는 지경에 이른다.

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가 자신이 보고 온 유토피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마치자 저자 자신이 ‘쌩얼’로 나타나서 자기 주인공에 대해 결정적 비판을 가한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 씨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한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큰 반감을 가졌던 점은 전체 체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 생활과 화폐 없는 경제였다.

혼란의 극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진지하게 이상국가 이야기를 해 놓고, 결론 부분에 와서 작가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 엎는다. 그것도 부분적인 반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 나라 제도의 핵심 요소인 사적 소유와 화폐제도 폐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모어의 진의는 무엇일까? 유토피아는 이상국가인가, 부조리한 사회를 그린 공상에 불과한가? 작중 모어와 히슬로다에우스 중 누가 진짜 모어의 뜻을 나타내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자들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캐릭터 모두 모어의 분신이다. 모어는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빌려 현실 세계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극단적 모델을 제시한 후, 다시 본래 자신이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그 모델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저자는 실험적인 상황을 만들어 넣고 자신의 두 자아를 세팅 속에 집어넣은 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사고실험을 한 셈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모델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하며, 저자 자신도 그것이 이상국가의 청사진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유토피아』의 내용이 아무런 의미 없는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하다. 모어는 한편으로 이상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또 다른 한편 그것을 무리하게 추구할 때 초래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다. 히슬로다에우스라는 주인공 이름의 뜻 그대로 허튼소리를 한 것이지만 그것은 매우 의미 깊은 허튼소리였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 내면에서는 인간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깊은 성찰을 경험한 것은 분명하다.

▲ 주경철 교수 (서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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