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원폭 2세 피해자 김형률 추모사업회 강제숙 위원장

1945년 히로시마의 버섯 모양 구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구름 아래에 있었던 원폭 피해자와 그 후세에게 대물림되는 아픔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70만여 명의 원폭 피해자 중에는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조선인 7만여 명이 있다. 이들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질병과 가난에 허덕였고, 그 고통은 정부의 외면과 사회적 차별 속에서 자녀 세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 김형률 씨는 2002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원폭 2세’의 존재를 알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이 전쟁과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역설하고, 원폭 2세가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주장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원폭 피해자의 참혹한 삶을 어루만지는 이가 있다. 『대학신문』 은 고 김형률 추모사업회 강제숙 운영위원장을 만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숨어 사는 원폭 피해자들의 삶과 이들을 지원해온 그의 활동에 대해 들어봤다.

가장 낮은 곳의 삶을 마주하다

“죽어서도 차별받는 그들을 봤어요.”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강제숙 위원장은 대학생 새내기 시절 목격했던 일본 평화공원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자료관 안에는 일본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었고, 조선인 피해자의 추모비는 홀로 평화공원 밖에 세워져 있었다. 당시의 쓸쓸한 기억을 가슴에 묻어둔 채 강 위원장은 일본 유학길에 올라 소수자 인권 문제를 공부했다. 강 위원장은 히로시마와 규슈 등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지역을 답사하면서 강제동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0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히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힘썼다. 특별법 제정 운동이 한창이던 때, 고 김형률 씨가 강 위원장을 찾아와 특별법 지원 대상에 원폭 피해자 1세와 그 자녀들까지 포함시켜주길 요청했다.

결국 국가가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을 돌보겠다는 취지로 특별법은 제정됐지만 대다수의 원폭 피해자는 법의 지원 대상에서 배제됐다.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건너간 만큼 강제동원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산이 많아 일본의 토지 수탈 정책에 취약했던 합천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군수산업이 발달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자발적으로 간 경우가 많아요. 합천 출신 피폭자를 비롯해 강제동원 특별법에 포함되지 못한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새로운)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법이 포괄하지 못한 것은 원폭 2세도 마찬가지였다. 강제숙 위원장이 고 김형률 씨와 손을 잡은 것도 원폭 2세가 원폭 피해자 중에서도 가장 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폭 1세와 2세 피해자들은 식민지 역사의 피해자이자, 사후에나마 국가로부터 보호받았어야 했지만 방치된 이중의 피해자가 됐다.

날 때부터 피해자, 원폭 2세의 끝나지 않은 전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조선인은 7만 명으로 추정되고, 살아남은 4만 명 중 2만 6천 명은 한반도로 돌아왔다. 원폭 2세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못했지만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본에서 귀국했던 1세의 숫자로 미뤄볼 때 최고 8~9만 명까지로 추산된다.

원폭 2세 중에는 선천적 기형을 안고 태어나거나 원폭 후유증과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에겐 백혈병만 알려졌지만 다운증후군도 있고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어 부모가 (말을) 대신해주는 2세도 있어요. 유전자에 상처를 입은 것이어서 언제, 어떤 병으로 나타날지 추측하기 힘들죠.” 2004년 인권위가 원폭 피해자 1,092가구의 자녀 4,080명의 기본 정보를 분석한 결과, 사망한 원폭 2세 중 52.2%가 10세 미만의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원인 불명이거나 미상인 경우(60.9%)가 가장 많았고, 같은 연령대에 비해 남성은 빈혈 88배, 심근경색·협심증 81배, 여성은 심근경색·협심증 89배, 우울증 71배 등의 발병률을 나타냈다.

사실 원폭 2세는 1세 피해자에 비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커밍아웃’이 더 힘든 상황이다. 원폭 2세 모두가 피해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건강한 2세는 유전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조차 꺼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피폭당한 원폭 1세 부모 밑에 두 자녀가 있다면 한 명만 아픈 상황도 종종 일어난다. “부모님은 아픈 자식을 생각하면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하지만 아프지 않은 자식을 생각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데 차별을 받을까 마음이 아프죠. 2세들 사이에서도 아픈 동생을 보면 문제를 알려야 하지만 건강한 자신을 생각하면 감추고 싶은 거죠.”

그럼에도 강 위원장은 원폭 2세의 고통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2세는 건강하더라도 3세, 4세에서 유전적 문제가 나타날 수 있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나타나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 위원장은 원폭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아픈 사람은 우선 치료를 받아야 해요. 아픈 사람이 유전이냐 아니냐를 증명할 수는 없죠.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 정부와 원자 폭탄을 개발한 미국 정부, 지금까지 문제를 방치한 한국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죠.”

그나마 1세 피해자에 대해선 일본과 한국 정부의 지원이 있다. 현재 1세 피해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매달 30만 원 정도의 의료비, 건강관리수당 등을 받을 수 있고, 한국 정부가 적십자사에 위탁해 운영하는 복지관을 이용할 수 있다. 사실 일본 정부로부터 이만큼의 지원을 받기까지 오랜 싸움이 있었다. “원래 일본의 원호법*에 따라 국외 거주 피폭자는 지원 대상이 안 됐는데 원폭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죠. 법원 판결에서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라고 해서 2003년부터 지원을 받고 있죠.”

하지만 원폭 2세에 대해선 양국 정부 모두 뒷짐만 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세 문제에 대해 유전인지 아닌지 아직 모른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2세 문제를 방치하고 있어요.” 이제껏 원폭 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진 것은 고 김형률 씨의 진정으로 2004년 인권위에서 실시한 조사가 유일하다. 그러나 설문조사로 진행돼 결과가 응답자의 답변에만 의존했고, 이미 1세 피해자의 90% 이상이 사망해 이들의 유자녀에 대한 온전한 정보를 확보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인권위는 원폭 2세를 선지원하고 유전 효과에 대한 증명 책임을 정부가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지만,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는 실태조사와 피해자 지원에 나서지 않고 있다.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복지 지원을 위해 머리를 맞대다

강제숙 위원장을 포함해 고 김형률 씨의 뜻을 이어받은 이들은 원폭 피해자와 그 자녀에 대한 실태조사와 의료지원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껏 국회에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안이 수차례 올라왔지만 지원 대상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국회에 관련 법안을 다루는 전문위원이 있는데 1세 문제만을 통과시키고 싶어 해요. 미국과 일본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 2세 문제에 우리가 먼저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깔려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설득하기 위해 강 위원장과 활동가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하는 등 직접 자료를 모으고 있다. “1세 피해자들 중에서도 치매에 걸리거나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세월이 흘러버리니 지난해부터 부족하게나마 증언집을 간행하기 위해 사건 당시와 자식에 관한 이야기, 현재 상태까지 듣고 있어요. 2세 분들도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70세까지 되셔서 시간이 촉박해요.”

그러나 당장 몸이 아픈 피해자들은 특별법이 제정되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이에 민간 차원에서 피해자들의 복지를 지원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2010년엔 추모사업회를 주축으로 고 김형률 씨의 뜻을 이어받아 경남 합천군에 원폭 2세를 위한 ‘평화의 집’이 문을 열었다.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평화의 집에서는 원폭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미술 치료를 진행했고, 지자체 지원 활동의 법적 근거가 될 조례 제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합천의 원폭 2세들은 지역 병원에서 무료로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또 평화의 집은 피해자들을 위해 해마다 한두 번씩 평화나들이를 기획한다.

활동가들은 피해자들의 전문 요양시설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땅 한평 사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원폭 2세는 각종 질병으로 일할 능력이 없어 부모가 사망하면 속수무책인데 지금 이들을 수용할 시설은 평화의 집뿐이기 때문이다. “정신지체를 앓는 아들 둘을 가진 원폭 1세 어머님이 암에 걸리셨는데 제게 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살아있어서 시간 개념도 없고 말도 못하는 자식들을 그나마 돌보는데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을 어떻게 하냐는 거죠. 요양시설이 분명 필요한데 평화의 집은 전세로 얻은 상태라 시설을 새로 짓기 위한 땅이 필요해 모금을 시작했어요.”

▲ 지난 3월 27일(일) 강제숙 씨가 원폭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원폭 피해자 문제처럼 역사 문제는 활동에 비해 그 성과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누군가는 또 해야 하고 저는 혼자 남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갈 겁니다."

절망이 아닌 희망의 대물림을 위해

강 위원장은 고 김형률 씨를 추모하는 자신의 활동을 ‘씨앗 뿌리기’에 비유한다. 먼저 그는 추모에는 실천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과거의 사람을 기억하는 걸 넘어 국가폭력이나 전쟁범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평화로운 세상을 가꿔가야 해요. 민주화운동도, 노동운동도 갑자기 세상이 바뀌진 않더라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씨앗을 뿌렸어요. 원폭 피해자 문제 역시 제가 활동할 때 해결되면 물론 좋겠지만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봐요.”

이러한 관점에서 강 위원장은 교육의 역할을 강조한다. “(피해자 문제를) 아는 것부터 출발할 수 있고, 먼저 알고 느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봐요.” 그가 원폭 피해자의 역사와 현황을 정리한 자료관 건립을 계획하고, 평화·인권 교육의 일환으로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을 쓰고 있는 이유다.

평화에 대한 강 위원장의 철학은 독특하다. 그는 쉽게 평화를 외치는 자들에게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되묻는다. “전쟁을 일으킨 자도 평화를 외치죠. 평화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가장 소외된 약자의 인권을 지키는 일에서 출발해요. 더 아픈 자의 편, 더 소외된 자의 편에 서서 봐야 합니다.” 종적으로는 역사 속에서 소외된 전쟁과 강제동원의 피해자들, 횡적으로는 어느 국가에나 존재하는 장애인, 여성, 노인처럼 가장 약한 이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얘기다.

원자 폭탄이 떨어지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그 순간 누군가의 몸에선 새로운 고통이 시작됐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절망적이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 혹자는 고 김형률 씨와 강 위원장의 삶을 두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의 활동이 원폭 피해자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이 희망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평화의 씨앗으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

*원호법: 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무상의료와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하도록 하는 법령.

 

사진: 장유진 기자 jinyoojang0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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