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은 세계 책의 날로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의 서거 400주기를 맞아 세계 각지에서 여느 때보다 다양하고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그즈음 한 포털 메인에는 영국과 스페인의 추모 풍경을 비교하며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나는 이번 학기 ‘세르반테스와 스페인 르네상스 문학’ 강의를 듣고 있어 수업 시간에 이 기사 내용을 전달하며 스페인 정부를 비판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서문학을 공부하는 나도 한 게 없으니 반성하라고 말씀하셨다. 내심 양심에 찔렸던 나는 이 글로 나의 뒤늦은 세르반테스 추모를 갈음하려고 한다.

여느 고전이 그렇듯 『돈키호테』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이 작품이 희극이냐 비극이냐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청소년 문고판으로 『돈키호테』를 처음 접했는데, 책이 너무 재밌어서 정말 깔깔거리며 읽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와서 완역본을 받아들자 그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받았는데, 불어난 책의 두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텍스트 이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저자의 모습 때문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흔히들 그가 다양한 문화권을 경험하며 습득한 자양분이 시공을 초월한 명작 『돈키호테』를 집필한 원동력이 됐다고 하지만 개인의 인생만 놓고 보자면 그처럼 기구한 인생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됐지만 나라에서 제대로 보상도 못 받았고, 귀국 중 해적에게 잡혔지만 몸값을 지불할 돈이 없어 5년 동안 알제리에서 포로 생활을 했으며, 뒤늦게 조세 징수원 자리를 얻었지만 송사에 휘말려 투옥됐고, 수감 생활 중 구상한 『돈키호테』는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가난했던 탓에 판권을 출판업자에게 모두 넘겨 큰돈을 벌지 못했다는 세르반테스의 전기를 들었을 때 나는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처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기사도 소설에 미쳐 모험을 나섰지만 결국에는 이상이 좌절된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만 보자면 돈키호테의 생애는 결코 희극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우스꽝스러운 기행을 지켜보고 있자면 독자들은 주인공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처럼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결코 평탄치 않았던 세르반테스의 인생에 비춰보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주인공의 삶을 어떻게든 유머와 해학으로 풀어내려는 세르반테스의 짠내 나는 노력에 다시금 코끝이 찡하게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 또한 누구나 알지만 정작 읽어본 사람은 없는 고전의 숙명에서 예외는 아니다. 돈키호테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상주의자의 아이콘으로 굳어졌지만 이는 낭만주의에 이르러 나타난 해석일 뿐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풍자와 해학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다. 작가가 죽은 지 4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로서는 진실을 알 길이 없고 저자 또한 서문에서 독자들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도록 청하고 있으니 작품을 직접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자유로운 해석의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선택장애를 앓고 있는 현대 한국인들을 배려해 『돈키호테』 한국어 완역본은 판본 가짓수도 몇 되지 않으며, 대부분 최근에 개정판이 나와 디자인이 예뻐서 책장에 꽂아두어도 보기 좋고, 두꺼워서 다양한 용도로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이참에 한 번 읽어보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름의 결론을 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400년 후의 독자가 작품을 직접 읽고 즐기는 것보다 작가를 위한 더 좋은 추모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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