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20대 여성이 한 남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수천 장의 포스트잇이 붙으며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여성이라는 점 외에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젠더, 페미니즘과 관련한 담론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 대학신문에서는 지난달 30일(목) ‘가장 오래된 문명, 미소지니(MISOGYNY)’라는 제목으로 명사 초청강연을 개최했다. 여성학자이자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인 정희진 씨가 연사로 나섰다. 강남역 사건을 통해 바라본 한국 사회의 젠더 인식, 한국적 페미니즘의 필요성 등을 중심으로 강연이 진행됐다.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성차별이라는 유령, 그와 싸우는 여성들

정희진 강사는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이 놀랐다. 저로서는 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일상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이 이번 강남역 사건에 주목하고, 놀라워하는 현상은 분명 이례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설명에 의하면 강남역 사건의 발생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 사회의 반응에서는 여성들의 변화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여성들은 성차별 그 자체의 폭력뿐 아니라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한 또 다른 폭력에도 노출돼 있다. 그는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령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의 경우 인종차별에 대한 의견과는 무관하게 모든 이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반면에 한국에서의 성차별 문제의 경우 그 존재 자체부터 부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성차별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우리 사회가 여성 상위 사회'라는 왜곡된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는 남성들이 여성의 역할이 많은 것과 여성의 지위가 높은 것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남성의 역할과 지위는 그 수준이 일치하는 것과 달리 여성의 역할이 많다는 것은 지위의 상승이 아닌 노동의 가중을 의미함을 간과한 시각이다. 가정에서의 ‘엄마’ 역할과 지위의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가정에서 엄마는 자녀 양육, 교육을 비롯한 각종 가사를 도맡아 수행한다. 엄마의 다중적 역할 수행은 단순히 ‘많은 노동량’을 의미할 뿐임에도, 많은 이들은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대장’이라고 인식한다. 그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자각하기는 쉽지 않다”며 남성들의 이러한 왜곡된 인식이 거대한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들의 의식은 성차별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며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성장해왔다. 그는 “나는 남녀평등교육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이 남존여비 사상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자신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여학생들은 남녀 간의 기회균등을 당연시하고 남존여비 사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오늘날 여성들의 의식이 과거와 분명한 차이를 보임을 밝혔다.

성차별을 이야기하면 매국노?

한편, 성차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남성들의 의식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그녀는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로컬 히스토리’, 즉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논의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뒤 미국에 의한 또 다른 식민지적 상황에 부닥쳐있는 ‘후기 식민국가’다. 제국은 남성으로, 식민지를 여성으로 간주하는 젠더화된 위계 구조에 비춰 볼 때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의 자리에 놓인다. 그는 “한국에는 미국이라는 강력한 대타자(大他者)가 있다. 미국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고 해석했다.
한편, 미국으로 상징되는 제국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의 자리에 놓인 한국 남성들은 한국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남성의 자리에 위치한다. 그는 “한국적 상황에서 힘없고 울분에 찬 식민지 남성들은 자신들을 우상화하지는 못할망정 평등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못마땅해한다”고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이 우선시되는 식민지적 상황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국가건설의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고, 따라서 평등을 이야기하는 여성은 매국노로 낙인찍히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처럼 제국 남성과의 관계, 한국 여성과의 관계에서 다른 위치에 놓이는 한국 남성들은 정신 분열적 증세를 보이게 되고, 성차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라는 잘못된 의식을 표출한다.

여성혐오? 미소지니!

인간의 의식은 거대한 구조적 요인과 연계돼 있다. ‘로컬 히스토리’ 역시 젠더 의식의 탐구에 있어 고려해야 할 하나의 요소였다. 번역의 문제가 의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 역시 그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그는 잘못된 번역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성희롱’으로 번역되는 ‘sexual harrassment’라는 단어를 예로 들었다. 그는 ‘sexual harrassment’의 ‘harrass’가 실제로 ‘희롱’보다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며 “‘성희롱’이라는 번역은 직장 내에서 언어뿐만 아니라 신체적 폭력도 많이 가해짐을 도외시하고 개념 자체를 희화화하거나 가볍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강연 제목이기도 한 ‘misogyny’를 여성혐오로 번역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phobia’에 가까운 혐오라는 말은 ‘xenophobia’(외국인 혐오)와 ‘homophobia’(동성애자 혐오) 등에서 보이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외국인과 동성애자는 특수한 소수 집단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인권의 개념은 평등, 동등이 아닌 관용과 배려다. 반면, 여성에게는 동등과 평등이 요구되기 때문에 혐오라는 표현을 여성과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는 번역이 잘못된 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특히 이해관계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번역을 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날 강연회는 최근 여성주의를 둘러싼 사회적인 관심도를 여실히 반영하듯 학내외 다양한 구성원들의 참여와 호응이 있었다. ‘행동하는 성 소수자 인권연대’의 ‘스톤’ 닉네임을 사용하는 한 청중은 “페미니즘 스터디도 하는 등 원래부터 관심이 많아 강연에 오게 되었는데 스터디를 통해 배웠던 것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생각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고 강연을 들은 소감을 밝혔다. 정희진 강사는 강연 말미에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는다”며 세계를 보는 하나의 렌즈로써 페미니즘을 공부해볼 것을 제안했다.

사진: 이문영 기자 dkxman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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