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영어교육과 학사졸업)

방학인데도 자하연 식당에는 아는 얼굴이 너무 많다. 관정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밥을 먹으니, 옷만 보고도 누군지 대강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매일 남자친구와 왔던 사람이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더욱 눈에 띈다. 어색한 고갯짓을 하지 않으려고 배식대를 등진 채 8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는다.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며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 밥을 먹는다. 순간 옆 테이블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나도 그를 보고 그도 나를 본 것 같지만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입학했을 땐 분명 가깝게 지냈던 동기다. 어렵게 들어온 학교인 만큼 신입생 땐 서로 동류의식이 강했다. 나이와 출신이 같아 더욱 그랬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장기하의 축하 공연을 보고 같이 마임이란 걸 췄다. 새내기 배움터에선 선배가 주는 술을 무작정 받아 마시다 다음날 함께 고역을 치렀다. 수업도 맞춰 들었고 시험공부도 함께 했다. 밤의 과방에선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둘 사이는 멀어졌고 그날은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술과 설렘, 당찬 포부로 가득한 시작과 달리 대학의 끝은 초라하고 지리멸렬하다. 졸업예정자들이 몸을 담글 자리를 찾기 어려워진 요즘은 더욱 그렇다. 그날은 학과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장학근로를 마치고, 기업 인턴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합격하면 학교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으레 떠나는 사람은 정들었던 공간과 사물 하나하나에 추억을 덧씌우며 이런저런 의미부여를 하는 법이지만, 당시 머릿속은 곧 있을 면접에서 토해낼 ‘1분 자기소개’로 복잡했다.

‘저는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습니다. 언어를 공부했고 학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구어든 문어든 행간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타인에게 어려운 개념이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런 소통 역량은 귀사에서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짓말. 대학에서 ‘정말로’ 배운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의 만족을 지연하는 삶의 자세다. 왜일까. ‘잉여인간’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엄습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난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빈칸’을 더는 만들 수 없었다. 휴학하거나 교환학생을 가지 않은 이유도, 졸업을 서두른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학기 중엔 술을 멀리 했고 학과행사 한 번 나가지 않았다. 통학 지하철에선 수업자료를 읽고 밤엔 마감기한이 다가온 페이퍼에 매달렸다. 빈 시간이 생기는 게 무서워 하루 24시간을 과외와 아르바이트, 봉사활동으로 꾸역꾸역 채웠다. 서울대학생으로서의 삶은 고통과 자기혐오, 의미상실의 연속이었다.

난 그런 ‘치졸함’ 덕분에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됐다.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400m 허들 경기를 뛰듯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시험 기간 버들골에 흐드러진 벚꽃을 좀 더 가까이에서 감상할걸. 식사하고 바로 도서관에 가는 대신 자하연 벤치에 앉아 연못 위로 떨어진 가을낙엽을 바라볼걸. 다른 과 전공수업도 들어보고, 농생대 식당에서 밥 한번 사 먹어 볼걸. 같이 수업 듣는 후배에게 말도 걸어보고, 지도교수님도 더 자주 찾아뵐걸. 그리고 그때 그 식당에서 마주친 동기와 근황을 나누며 밥 같이 먹을걸. 그날 본 면접으로 인생의 또 다른 변곡점을 지나게 된 지금에서야 과거를 후회한다.

졸업장이 나오는 29일이 되면 나는 떠난다. ‘좋은 학교 오래오래 다녀야지’란 마음속 자기 기만적 주문을 뿌리치고 나는 떠난다. 관악02 막차를 놓치고 낙성대역으로 걸어갈 때 불어오던 세찬 눈보라, 중앙전산원에서 밤을 새우고 나왔을 때 들이마신 차가운 새벽 공기가 두 볼을 스친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지금. 앞으로의 내게 “대학에서의 3년 반이 뼈아픈 교훈이었다”고, “그때의 경험 덕분에 현재에 감사하고 인연의 소중함을 알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미리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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