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혜석 탄생 120주년 기념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 전

근대 신여성 화가, 여성해방론자,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며 가부장제에 맞서다 외로이 삶을 마감한 작가. 화가 나혜석에게는 그가 살면서 겪은 우여곡절만큼이나 많은 수식어가 붙어 왔다. 스캔들로 먼저 기억되던 그의 예술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4월부터 나혜석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그의 고향인 수원의 시립 아이파크미술관에서는 새로 공개된 작품과 자료를 담은 전시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가 열렸다. 전시는 그의 생애를 다룬 ‘혼돈의 시대, 나혜석을 만나다’, 미술 세계를 표현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다’, 그가 쓴 글을 담은 ‘자유를 향한 여정을 떠나다’의 3부로 나뉘었다. 작은 전시장을 돌아보며 그의 삶과 작품세계, 나아가 나혜석 담론의 현주소까지 살펴봤다.

 

전업 화가와 페미니스트 작가, 가장 처음의 길을 걷다 

나혜석은 1896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미술학교에 진학해 조선에서 보기 드문 여자 유학생으로 주목받았다. 조선보다 개방된 일본에서 여성 해방 사상을 접한 뒤에는 여성 유학생 모임을 조직하고, 기관지 「여자계」를 출간했다. 귀국 후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고 ‘여자야학’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해 여성 운동가이자 민족 운동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나혜석은 전업 화가로서의 삶을 개척하며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다. 1부에 전시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 입선작과 함께 찍은 그의 사진엔 화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눈길을 끈다. 그는 1922년부터 조선미전에 그림을 출품해 10여 년간 입선했고, 1920년에는 경성에서 역대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열어 5천명의 관객이 다녀가고 모든 작품이 팔리는 등 이례적인 성공을 거뒀다. 예술을 천시한 당시 유교사회에서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나혜석의 성공은 단연 돋보였다. 윤범모 교수(가천대 예술대학)는 “새로운 서양식 화법이었던 유화를 배워 최초의 전업화가로 활동한 나혜석은 예외적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오롯이 담아낸 집필활동으로도 크게 주목받았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그는 새 시대 여성의 권리를 다룬 평론 ‘이상적 부인’과 최초로 여성 지식인 주인공을 내세운 페미니즘 소설 「경희」를 집필했다. 결혼 후엔 ‘모(母)된 감상기’를 집필해 자신의 경험에 비추며 모성본능이 편견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불륜 사건이 불거져 이혼당하고도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당당히 글로 표현했다. 남편과의 연애부터 이혼을 다룬 「이혼 고백서」(1934)에서 그는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했으며, 이는 ‘정조 취미론’으로 알려진 「독신여자 정조론」(1935) 발표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 멸시당했지만 나혜석은 말년까지 집필 활동을 했다. 서정자 명예교수(초당대)는 “죽기 전에도 후배 작가 박화성에게 ‘계속 여성을 위해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촉망받는 신여성에서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나혜석의 인생사는 전시에서 사진과 자필 편지로 생생히 드러났다. 1부에선 유족이 최초로 공개한 앨범을 통해 나혜석의 삶의 면면을 담은 사진을 볼 수 있고, 3부에서는 나혜석의 글과 함께 자필 편지가 공개됐다. 윤범모 교수는 “유존된 작품이나 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편지와 앨범이 처음 공개됐다”며 이번 전시의 의의를 설명했다.

 

풍경과 사람으로 치밀하게 채워낸 화폭

천후궁,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26

화가 나혜석을 대표하는 그림은 풍경화다. 조선미전에 출품한 그의 초기작들은 풍경화이면서도 농민과 여성의 노동을 포착해 현실 감각을 보여줬다. ‘봄이 오다’(1922)와 ‘농가’(1922)가 대표적인데,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필치로 밭일하고 곡식을 고르는 등 실감 나는 농촌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직업과 가사를 병행해야 하는 여성을 그린 그의 신문 삽화와도 유사하다. ‘천후궁’(1926)과 같이 건축물을 그린 풍경화도 주목받았는데, 이에 대해 조선일보에는 ‘배치와 윤곽의 정돈된 점으로 보든지 석축한 장원의 단조한 색채를 잘 처치’했다는 평이 실리기도 했다. 현재 진품은 남아 있지 않지만, 2부에서는 도록에 실린 흑백 사진으로나마 이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8x75cm, 1928(추정)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된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나혜석의 진품 유화이자 후기 화풍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자화상’은 서구적인 얼굴 윤곽과 어두운 배경색이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윤범모 교수는 “‘자화상’에서 그의 강인한 성품과 자존감을 읽어낼 수 있다”며 “배경을 생략해 단색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우영 초상’ 역시 굵직한 선이 돋보인다. 두 작품은 풍경화에서의 섬세함보다는 힘찬 필치와 강한 느낌이 돋보여 1920년대 후반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파리 체류 시절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그림은 나혜석의 막내아들 김건 씨가 소장하던 것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됐다.

페미니즘 작가로 유명한 나혜석이지만 사실 그의 미술 세계에 페미니즘 사상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현존하는 작품 수가 적어 엄밀히 판단할 수 없지만, 그림에서 여성 해방을 직접 나타내는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한편 일각에선 ‘천후궁’이나 ‘정원’(1931)의 구성 요소가 억압받는 자궁, 정조대 등 성적 억압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거나(박계리), ‘자화상’ 등 인물화에서 주체적인 근대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강태희). 그의 작품이 아직 다 발굴되지 않은 만큼 이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작은 전시가 보여준 '나혜석 담론'의 현재 

최초 공개된 두 점의 유화를 비롯한 30여 점의 그림, 사진 자료 등을 포함해 90여 점의 자료를 선보였지만, 생전에 300여 점의 그림을 발표했다는 기록에 비춰보면 전시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작품이 보존되지 못해 출처가 확실치 않고, 출처가 있는 조선미전 입선작조차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작업실에서 발생했던 화재와 시대를 앞서간 행보에 대한 당대 사회의 반감 때문으로 보인다. 서정자 교수는 “이혼 후에도 나혜석은 수많은 그림을 그려 전시했지만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며 “당대 윤리에 저항한 그의 작품을 사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정 문제 역시 작품 발굴을 어렵게 한다. 윤범모 교수는 “명백한 가짜 그림이 미술관에 걸리거나 논문 집필의 대상으로 부각되기도 한다”며 “화가로서의 나혜석은 유존 작품의 희귀성 때문에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상황에도 나혜석의 미술 세계를 조명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1995년 발족한 ‘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는 나혜석 연구를 위해 해마다 심포지엄을 열고 있고, 2012년 창립된 ‘나혜석학회’는 문학, 미술사, 여성사 등의 분야에서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있다. 서정자 교수는 “만주에서 열었던 전시 작품이나 판매 기록이 남은 작품 등 발굴해야 할 자료가 많다”고 지적했다.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여성 해방을 외치면서도 ‘인간으로 자유스럽고, 마음껏 예술의 창작으로 정진하는 것’을 희망으로 삼은 예술가 나혜석, 그의 숨결이 묻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닿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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