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메갈리아 논란에 관한 메타비평

윤광은 문화평론가

지난 7월 18일 성우 김자연 씨가 영어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웹사이트 메갈리아를 모체로 한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가 소송 자금을 마련하려 판매한 티셔츠다. 한 무리의 네티즌은 이 사실을 지목하며 게임 ‘클로저스’의 성우로 김자연 씨를 고용한 게임업체 넥슨에 항의했다. 다음날 7월 19일 넥슨은 김자연 성우를 교체하는 특단을 내렸다. 한국 사회의 여름을 먹어 삼킨 ‘메갈리아 사태’는 이렇게 시작됐다. 메갈리아는 반사회적 사이트이므로 배제해야 하는가, 메갈리아를 향한 폭력에 반대해야 하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후자의 입장이고 메갈리아의 페미니즘적 실천을 긍정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논란에 찬반 의견을 더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한 단계 높은 시점에서 사태를 회고하며 저변에 깔려있는 시사점을 건져 올리는 게 좋겠다.

메갈리아 사태로 서브 컬처 업계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김자연 성우와 넥슨이 계약을 해지한 후, 일련의 사건이 뒤따랐고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 업계는 검열 당해도 싸다’는 ‘예스컷 운동’이 웹툰계에 횡행했다. 메갈리아에 관용적 태도를 취하거나 반메갈리아 여론을 비판하는 업계 종사자에게 비난이 쇄도했다. 그들이 소속된 업체는 집단 항의와 회원 탈퇴로 압박당했다. 몇몇 인사는 입장을 철회했고, 한 웹툰 업체는 소속 작가들에게 ‘입조심’을 종용하는 메일을 보냈으며, 웹툰 산업 협회 회장은 “메갈리아 유저와 같이 일할 수 없다”라고 선포했다.

저들은 서브 컬처 소비자라는 지위, 그를 뒷받침하는 구매력을 ‘힘’으로 환전하고 공론의 영역에서 휘둘렀다.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인물, 내가 적대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입을 막으려한 민주적 사회 질서를 유린하는 폭거다. 이런 삐뚤어진 소비자 논리는 사회의 깊은 환부에서 배출된 것이다. 메갈리아를 위시한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 또한 여성혐오와 연루된 기업·유명인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수행돼 왔다. 반메갈리아 여론은 그런 전례를 들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다. 메갈리아의 소비자 운동은 저들과 달리 사회적 명분을 쥐고 있었다. 여성의 지위가 열악한 사회에서 여성혐오에 경종을 울리는 활동은 의미있다. 다만 이를 소비자 운동의 팽창이라는 사회적 트렌드 속에서 바라볼 때 숙고할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구매력에는 한계가 있다. 메갈리아의 소비자 운동은 여성이 주요 소비자로 향유하는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 그간의 운동이 대중문화에 집중된 이유다. 이 사실을 뒤집으면 남성이 주요 소비자로 대접받는 시장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번 사태 또한 남성향 콘텐츠를 무대로 벌어졌기에 폭력적 불매운동에 항거할 수단이 없었다. 여성의 구매력이 원론적으로 남성보다 작다는 사실도 거론할 수 있다.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남성보다 낮은 사회에서, 약자가 지닌 경제력으로 평등을 이루려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무엇보다, 구매력에는 가치가 없다. 구매력은 소비지출의 척도이자 원천일 뿐, 그 자체로 이념과 윤리를 함축하지 않는다. 소비자 운동을 통해 시장에서 공론장으로 넘어갈 때, 소비자란 정체성을 시민이란 정체성으로 갈아입고 그에 걸맞은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지향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면, 이번 사태처럼 각자가 힘을 가진 영역에서 번갈아 구매력을 행사하며 대결하는 악순환을 막아낼 수 없다.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건 왜 페미니즘이 소비자 운동으로 진행됐는가다.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여성혐오는 성차별 구조의 표층이다. 가시화된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것과 함께 구조적 토대에 손질을 가해야 한다. 이것은 장구한 시일과 제도적 개혁이 필요한 문제로, 온라인에서 규합되는 여론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고 개혁과정을 담보해낼 주체가 있어야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이념에 눈 뜬 개인들이 아무리 사회를 바꾸려 해도, 공익을 구현할 수 있는 통로는 시장이었고 변화의 효용감을 주는 건 구매력이란 자력구제의 수단이었다. 메갈리아 사태를 부른 진범은, 시장 외의 공적 영역이 지리멸렬하고 개인과 구조를 매개하며 사회적 과제를 풀어갈 시민사회가 허약한 현실이다. 사회적 갈등이 날것 그대로 표출되고, 그것을 해결할 정치는 보이지 않으며, 여론의 차원으로 전가된 갈등이 방치된 채 곰삭아 버리는 익숙한 풍경이다.

화해할 수 없이 갈라선 여론이 서로를 포격하는 사회적 패싸움이 벌어졌지만, 그것을 중재할 정당의 존재감은 공란이었다. 원내 3당은 사태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정의당은 거듭되는 입장 번복으로 줏대를 잃고 휘청거렸다. 메갈리아로 돌아가자면, 특정한 이념 노선을 지향하는 온라인 운동이 이토록 존재감을 남긴 사례는 드물 것이다. 몰카 근절과 소라넷 폐쇄처럼 이들은 사안마다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왔고 성과도 이뤘다. 그러나 어떤 정치집단도 이들이 일으킨 바람을 받아 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워마드와 레디즘으로 분화한 후 활동이 정지된 일개 인터넷 사이트가 무려 1년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선 현실은 여성의제 과소대표와 대의정치 실패를 참혹하게 폭로한다.

지금까지 메갈리아 사태에 관해 사회적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그 맞은편에 있는 남성들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청하려 한다.

MB 정부 이후 십여 년간 진보담론은 절대 악에 대한 대항 서사와 2030 세대를 피해자로 호명하는 세대론의 두 축으로 조직됐다. 그것이 집약된 것이 2012년 총선 전까지 야당의 선거 승리를 이끈 2030 유권자 동원 전략이다. 세대론은 실업난과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직면한 젊은 세대 현실을 의제화했단 의의가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고령층의 빈곤이 더 심하다거나, 세대 내부에도 계층이 있다거나, 정작 이 담론을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소비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세대란 단일 범주로는 교차적 권력관계를 담기 힘들 것인데 젠더 문제도 그렇다. ‘88만원 세대’라고 할 때, 남자 취준생과 여자 취준생의 입장이 얼마나 구분됐고, 젊은 여성이 겪는 특수한 고용차별이 조명됐는지 물어볼 수 있다.

세대론의 대유행을 개시한 도서 ‘88만원 세대’의 표지 그림은 한 젊은 남자의 풀 샷이다. 그는 품 큰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을 쥐고 선 채 맥없이 땅을 쳐다본다. 상징적 이미지다. 세대론이 호명하는 피해자엔 고개 숙인 취준생, 윗세대처럼 직장과 내 집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사회화에 실패한 ‘예비 가부장’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의 2030 남성들만큼 ‘약자/피해자라는 호명’을 집중적으로 세례 받은 세대는 없다. 진보 진영의 세대론은 젊은 세대 현실을 비극적으로 쥐어짜며 연민의 논조로 기성세대에 죄의식을 요구하는 면이 있었다.

야권 성향 젊은 남성들이 사회를 인식하는 방식은 ‘헬조선’을 만든 절대 악(새누리/친일독재 잔당/TK·고령층 유권자·미개한 국민-타자)을 상정하고 사회의 피해자로서 자조하는 것이다. 권력관계를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고, 악의 맞은편에 있단 사실만으로 선함을 자부하며, 피해자라는 자기 연민에 파묻힌 이들은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절대 악과 절대 선으로 나뉘는 세계 속에서 가해자로 분류되는 건, 피해자로서 누리던 도덕적 정당성과 담론적 지위를 깡그리 잃고, 내가 부정하던 그들과 같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다.

많은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호명에 반발심을 토한다. 같은 남성으로서 그런 반발에 심정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논리적 차원에서 저 호명은 틀린 것이 없다. 유사 이래 사회는 남성이 보편자인 사회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은 무산계급 남성과 개신교도, 유대인, 흑인, 흑인 노예에 이어 가장 늦게 시민권을 허락받은 집단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비탈길은 사회 전방위에 깔려있다. 웹하드와 토렌트에는 리벤지 포르노가 아무런 규제 없이 유통된다. 그 영상을 다운 받는 숱한 ‘평범한 남성’은 피해 여성의 신원을 퍼트리고 명예를 파묻는 데 한 삽씩 거들고 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은 여전히 팽배해서 직업 활동에 가사 활동을 떠안으며 삶의 핸디캡을 이고 사는 여성들이 있다. 여성 고용차별과 승진제약은 그 관행에 이의 제기하지 않고 수긍하는 남성 관리자들 손으로 집행된다.

여성이 약자라면 강자가 있다. 여성이 차별 구조 속 피해자라면 구조의 촉수로 행동하는 가해자가 있기 마련이다. 남성이 그것을 자각하는 건 가부장 인습의 수행자요, 성차별 제도의 수혜자로서 각성하는 값진 윤리적 실천이다. 내 존재가 타락했다고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자/가해자’의 자리를 삭제해버리니까 이항대립이 무너지며 여성이 약자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게 된다. 메갈리아 사태가 뜨거울 때 정의당 게시판에 한 청년 당원이 써서 화제가 된 글이 있다. ̒연애도 돈벌이도 넉넉하게 하지 못한 우리는 사회가 버린 불쌍한 피해자다. 왜 윗세대가 만든 성차별 사회의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가.' 청년세대를 피해자로 과잉 호명하며 담론을 조직해 온 세대론의 반작용을 이보다 자의식 넘치게 재현할 수 있을까.

삶의 어떤 단락에선 자신이 힘을 가진 가해자일 수 있다고 상상하고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은 사회 구성원 저마다가 배양해야 할 과제다.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인 남성도, 그것과 중첩된 인종적·젠더적 관계망 위에서 강자가 될 수 있다. 권력관계의 상대성을 구체적으로 자각하지 않으면, 사회의 강자로서 벌인 폭력을 사회의 약자라는 이름으로 면책하는 자기기만을 저지른다. 각각의 사회적 국면에서 서로가 약자로서 연대하는 한편 강자로서의 책임을 성찰할 때 공동체는 정의로워질 것이다. 7월에는 서울대에서 ‘단톡방 성희롱’이 폭로되기도 했다. 내 친구들이 같은 잘못을 한다면, 나는 단호하게 꾸짖으며 제동을 걸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놓치지 말고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윤광은 문화평론가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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