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세계미학자대회

노엘 캐롤 교수는 "사람들이 대중예술에 매료되는 이유는 상당한 감정적 각성을 수반하는 '쾌'(pleasure)를 현실적인 대가 없이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며 사람들이 대중예술에 감정 이입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이라고 지칭하며 표준화, 규격화, 상업화된 성격의 대중문화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다수의 저급한 취향을 목표로 하고 수동적인 감상자를 기를 뿐이라는 이유로 맥도날드, 그린버그 등의 학자들은 대중예술이 저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동안 미학계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는 비판이 주를 이뤘으며, 우호적인 접근은 드물었다.

하지만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서울대에서 개최된 제20차 세계미학자대회에서는 ‘미학과 대중문화’라는 주제 하에 열린 태도를 가지고 대중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조명하고자 했다. 7개의 초청 석학 강연, 24개의 라운드 테이블 세션, 81개의 일반 세션으로 구성된 이번 대회에서는 35개국에서 온 학자들의 논문 370여 편이 발표되며 활발한 학문 교류의 장을 이뤘다.

대중예술, 예술과 인간을 다시 읽다

대회 첫날 기조연설자로 나선 오병남 명예교수(미학과)의 강연은 대중예술에 대한 긍정적 논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이번 학술대회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는 통합을 구현하는 대중예술이 인간에 대한 파편적 인식에서 총체적 인식으로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했다.

근대 미학의 시작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접근은 크게 감상자, 예술가, 작품의 관점에서 파편적으로 이뤄져 왔다. 하지만 오 교수는 “예술의 진정한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전통적 접근법에서 탈피해야한다”며 대안적 접근법으로 ‘수행’(performance)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예술의 수행이라는 역동적 움직임 속에서 감상자, 예술가, 작품이 질적으로 통합될 때 예술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대중예술이다. 대중예술의 영역에서는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창작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의 창작물을 감상하기도 하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대중예술의 시대에 개인은 감상자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즉 감상자와 예술가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대중예술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가능성 역시 보여주는 것이다. 오 교수는 “예술은 언제나 감각들의 원초적 통합이 이뤄지는 단계인 경험의 원초적 단계에 기초한 인간 행위였다”며 오늘날 그와 같은 통합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중예술이 파편적 인간관을 넘어 온전한 인간관을 회복하는 데에 기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왜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는가?

이번 대회를 찾은 노엘 캐롤 교수(미국 뉴욕시립대 철학과)는 우리가 대중예술과 소통하는 그 자체에 주목했다. 영화, 텔레비전, 만화 등의 대중예술은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고, 사람들은 정서적 경험을 위해 대중예술을 소비한다. 그는 감정이 “주위 환경에 대해 빠른 판단을 내리는 기제”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두려움의 감정은 주위의 위험요소에 대한 빠른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우리의 사활적 이익을 보호한다. 한편 그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의 환경은 특정 감정을 유발하려는 의도로 사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며 이미지, 장면, 사건의 순서 모두가 감정의 환기를 위해 사전에 계획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시청자의 혐오감을 유발하기 위해 좀비의 신체 부분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그는 “관객의 정치, 종교적 신념과 같은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사전계획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전 설계에 따른 시청자의 감정 유발이 필연적이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의 사활적 이익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허구적인 세계에 우리가 정서적으로 반응하고 몰입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그는 ‘도덕’(morality)을 답으로 제시한다. 캐롤 교수는 “사람들은 자신의 특정한 가치 정향이 모든 상황에서 실현되길 바라며, 가상 환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대중예술에 우리의 감정을 투영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영화의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는 이유는 그와 공유하는 윤리의식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도덕’과 ‘가치’ 때문에 대중예술을 향유하며 울고 웃는다.

창조성의 원래 주인은 나, 대중예술!

근대 서양의 역사로 시선을 돌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대중예술의 창조성에 주목한 시도도 있었다. 사사키 겐이치 교수(일본 도쿄대 미학과)는 순수예술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창조력을 가진 천재’라는 개념은 사실 오늘날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대중예술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유럽에서는 생산력과 부의 증대로 인해 대중의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가능해졌다. 순수예술은 대중예술과 공존했지만, 현대의 순수예술처럼 특권적 지위를 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사키 교수는 “‘대중에 의해 생산된 예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대중예술은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의 뒷받침을 받아 진정한 예술로 인정받았다”며 대중예술이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중예술의 지위는 토양으로부터 싹이 나오듯 대중에게서 나오는 창조성을 상징하는 개념인 ‘식물 모델’(plant model)에 의해 강화됐다. 당시 후원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구조 탓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제약을 받던 순수 예술가들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 자율성과 창조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때 이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식물 모델’이었다. 사사키 교수는 “경제적 독립을 추구한 순수 예술가들이 대중의 창조성을 뜻하던 ‘식물 모델’을 원용해 ‘창조력을 가진 천재’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개인 노력의 결과물을 인정하는 지적재산권이 생겨났고, 지적재산권에서 발생하는 수익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된 순수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창작 권리를 얻게 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순수예술은 대중예술과는 차별화돼 자율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았고, 신성화됐다.

사사키 교수는 “서구에서 순수예술이 특권화돼 가고 있었던 것과 달리, 에도시대에는 대중예술이 꽃피고 있었다”며 대중예술은 넘치지만 그에 대한 미학적 접근은 부족한 오늘날, 에도시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도시대의 대중은 문화의 소비자이자 창조자였다”며 사회적 계급 상승의 욕구가 대중문화를 추동한 동력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통 순수예술이 존재했지만 대중예술의 열등함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창조성은 절대적으로 대중 측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며 에도시대는 그야말로 대중예술의 시대였다고 주장했다. 사사키 교수는 “현대 대중문화에서 보이는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과거 에도시대의 가부키 극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며 대중문화 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미학의 실마리를 과거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초 대중문화에 대한 많은 반대 이론이 개진됐고, 이후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일군의 학자들은 대중문화도 순수예술처럼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대중문화의 홍수라 불리는 오늘날, 대중문화는 세계미학자들의 논의 중심에 자리했다. 이번 세계미학자대회는 이와 같이 대중예술의 달라진 위상과 학계의 풍토 변화를 여실히 입증해줬다.

한편 그간 서양 중심으로 주도됐던 미학계의 담론장에 생겨나고 있는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자리기도 했다. 이번 대회 사무총장직을 맡았던 이해완 교수(미학과)는 “과거 미학계의 논의는 영미 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점점 아시아계 학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며 “이번 대회에서도 그러한 추세를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에서의 미학 연구 수준과 한국 학생들의 역량을 세계에 알린 것이 향후 한국 미학계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번 대회가 갖는 의의를 평가했다.

사진 제공: 제20차 세계미학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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