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회대 농활을 다녀오다

서울에서 5시간을 달려 밀양에 도착하자 쏟아지는 한 여름의 햇살이 반겼다. 한산하던 ‘햇빛 가득 넘치는 고을’에 몸뻬바지와 밀짚모자, 팔토시를 맞춰 입은 학생들이 활보한다. 지난 8일(월)부터 6박 7일간 밀양에서 이뤄진 사회대의 ‘2016년 농민·학생 연대활동’, 사회대생인 기자가 그 뜨거웠던 여정에 함께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농민·학생 연대활동(농활)의 성격은 달라져왔다. 일제강점기 브나로드운동에서 출발한 농활은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며 농민의 빈곤 타파와 사회 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회의 탈정치화, 농촌의 축소와 더불어 농활의 정치적 색채는 옅어지고 오늘날 농활에서는 체험 활동이나 일손 돕기가 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회대 농활은 그러한 추세와 달리 연대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며 ‘밀양 반송전탑 대책위원회’와 함께했다. ‘제주 강정’에 ‘해군 기지’가, ‘성주’에는 ‘사드’가 그러하듯 ‘송전탑’이라는 꼬리가 마치 호응하듯 따라붙는 밀양. 150여 명의 학생들이 765kV의 거대한 송전탑이 뒤흔들어놓은 9개 마을로 떠나 그 아픔과 마주하고 돌아왔다.

푸르른 밀양을 뒤흔들어 놓은 송전탑

농활은 송전탑 반대 투쟁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밀양 아리랑’ 상영으로 시작해 ‘반송전탑 촛불 문화제’ 참여로 끝났다. 그 가운데 만난 여러 주민들에게서 여전히 생생한 밀양의 아픔을 문득 문득 느낄 수 있었다. 2001년 시작된 송전탑 건설 논의는 2005년이 돼서야 주민들에게 알려졌다. 당시 송전탑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주민들은 “전봇대 하나가 들어서는 정도인 줄만 알았다”고 전한다. 불쑥 걸려온 전화를 통해 당신 소유의 논밭에 송전탑이 들어올 것이며, 팔 수도 없는 땅에 한국전력(한전)이 마음대로 정한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통보를 받기 전까지 주민들은 제대로 사태를 인지할 수 없었다. 2011년이 돼서야 ‘밀양 반송전탑 대책위원회’(대책위)가 꾸려지고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됐다.

그 어떤 객관적 사실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은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개개인의 이야기였다.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알몸에 쇠사슬로 스스로의 몸을 묶은 ‘할매’, ‘사람 있고 전기 있지 전기 있고 사람 있냐’는 외침. 아픈 무릎을 이끌고 투쟁을 위해 산을 기어서 오르던 주민들이 2014년 6월 행정대집행*으로 움막 농성장을 철거당하기까지 겪었던 굴곡들. “농사짓고 평범하게 살다가 말년에 송전탑 때문에 욕봤다”던 할머니는 반대 농성을 벌였던 당시의 기억을 전해주셨다. 그는 “할매 한 명에 경찰이 20명씩 붙어 억지로 끌어내렸다”며 “그런데도 오히려 우리가 잘못한 거만 크게 부풀려서 나오고, 경찰들이 잘못한 거나 우리가 잘한 거는 하나도 안 나오더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농성장이 철거되고 송전탑이 완공되면서 많은 이들은 반송전탑 투쟁이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은 “여전히 한전에 합의하지 않은 가구가 198세대”라며 “밀양의 저항은 2005년 이후 11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모두가 똘똘 뭉쳤던 투쟁의 장에 계속되는 탄압과 결국 이기지 못하리라는 절망감, 한전의 달콤한 합의금 제의 등이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이제는 몇몇 사람만이 남아 외로운 싸움을 끌어가게 됐다. 고답마을 바로 옆마을인 여수마을은 송전탑 반대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지금은 한전과 자매결연을 맺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합의하지 않을 것이라던 한 할아버지는 “무너져 가는 집에 살더라도 정의를 지켜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80살이 넘은 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다음 세대들이 이런 땅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며 “정의는 결국 밝혀질 것”이라고 말하는 ‛할배’.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굽은 손가락과 주름진 얼굴, 형형한 눈이 가슴에 박혀왔다.

둘로 분열된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배신감과 적개심을 품게 됐다. 이미 다수의 주민들이 한전과 합의해버린 상황에서 ‘송전탑’은 민감한 단어가 됐고, 일부 주민들은 송전탑 관련 연대 활동 자체를 껄끄러워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대책위 김영자 총무는 “처음에 다 같이 모여 산에 올라가서 투쟁할 때는 차라리 즐거웠다”며 "예전에는 내 것 네 것 없이 나누는 사이였던 사람들과 이제는 말도 하지 않게 됐다"며 속상한 심정을 고백했다. 송전탑은 이들의 땅과 집, 건강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맺어온 인연까지 망가뜨렸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농활대원들이 모두 입었던 단체 티셔츠에는 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농활이 끝난 뒤에도 반짝이는 불빛들과 화려한 야경을 볼 때면 눈 앞에 그 글자들이 아른거리는듯하다. 직접 확인한 송전탑은 정말로 마을 바로 앞에, 마을회관에서도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안개 낀 아침에 찾아간 송전탑은 그 끝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765kV 송전탑은 100미터 정도, 아파트 30층을 훌쩍 넘는 높이다. 한적한 시골 풍경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철골은 볼 때마다 그 내막을 곱씹어보게 했다. 우리 주변에는 외면당한 눈물이 얼마나 많을까.

마을회관 앞에는 농활대원들이 직접 만든 현수막이 걸렸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매, 할배들

농활의 크나큰 매력 중 하나는 평소에 만날 수 없던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있는 방 문을 열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런 걱정들은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준비해간 마을 잔치나 어르신 이름으로 시 짓기, 염색해드리기 등의 분반활동 등을 하면서 덜어낼 수 있었다. 할머니들 흰머리에 까만 염색약을 발라 드리면서 손녀 이야기, 마을회관의 일상, 그리고 서울에 사는 우리의 이야기가 소소하게 오갔고 덕분에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전예아 씨(정치외교학부·15)는 “할머니께서 더 배우고 인생을 즐기라는 조언을 해주셨다”며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이어서 그런지 더욱 마음에 새겨지는 듯 했다”고 전했다.

돌이켜보면 주민들이 정을 참 많이 주셨는데 왜 사서 걱정했던건가 싶다. 작업을 마친 농활대원들에게 편하게 씻으라고 욕실을 내어주고, 더운데 고생이라며 걱정하고, 시내로 나간다는 말에 버스 시간을 꼼꼼히 알려주시던 주민들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유난히 큰 소리로 꾸중하시던 할머니가 떠나기 전 인사에 “간다니 섭섭타”며 다른 연대자들이 한번 온 이후로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한다며 은근한 압박을 주시던 모습은 두고두고 꺼내볼 추억이다.

쌀 미(米)자를 풀어 쓰면 ‘八十八’이 된다고 한다. 한 할아버지는 이를 두고 “농부가 벼 씨앗을 뿌려 거둘 때까지 여든 여덟 번 손을 써야 할 만큼 키우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농사일을 처음 접하는 농활대원들에게는 힘듦보다 재미가 앞섰다. 발이 푹푹 빠지는 논에서 처음에는 똑같아 보이던 피와 벼가 점점 눈에 익어가고 푸른 잎들 사이에서 발견하는 빨간 고추가 예뻐보이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큰 정성이 담긴 농사를 내던지고 ‘데모꾼’이 돼야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농활대원들이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과 윷놀이를 하며 친밀감을 쌓고 있다.

우리 모두가 함께하다

가족 이외의 누군가와 일주일간 삼시세끼를 먹으며 함께 지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농활대원들은 서로의 생각을 마음껏 나누고 책임을 공유한 덕분에 웃음이 가득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모두가 예민해질 수 있을 만큼 열악했다. 농활대원들은 주민들이 가장 많이 마을회관을 찾는 시간인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는 주민분들의 편의를 위해 거의 사용되지 않는 마을회관 2층에 있기로 했는데, 열기가 절정인 그 시간에 에어컨이 없는 2층은 그야말로 찜통 속이었다. 앉아만 있어도 땀이 눈을 찔렀고 선풍기는 뜨뜻미지근한 바람을 겨우 내뿜었다. 폭염의 한 중간에 있었던 8월의 밀양,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매일 5시께 일어나 작업해야 했고, 부족한 공간을 나누며 요리와 청소도 스스로 해내야 했다.

그러나 농활대원들은 둘러 앉아 적어내려간 생활 내규와 성 평등 내규를, 이를테면 잠기지 않는 샤워실 문에는 사용중 팻말을 걸어두고 반드시 노크하자는 등의 작은 약속들을 존중했다. 또 각종 ‘주체’를 정해 벌레를 잡는 ‘방역 주체’, 먼저 일어나 농활대원들을 깨울 ‘기상 주체’, 작업 때 힘을 북돋는 ‘응원 주체’ 등 각자가 하나씩의 책임을 맡았다. 그 일련의 논의 과정이 각자 구성원들에게 서로가 공동체임을, 그리고 앞으로의 임무들을 함께 해결해나가야 함을 자연스럽게 알려줬다. 매일 저녁에는 ‘평가와 반성’ 시간을 가졌다. 김상재 씨(사회과학계열·16)는 “매일 반복되는 ‘평가와 반성’이었지만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았다”며 “각자의 하루를 돌아보고 공유한 덕분에 구성원간 갈등 상황이 없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한낮 시간, 마을회관 2층 찜통 속의 농활대원들은 말 그대로 뜨거운 토론을 했다. 농활의 핵심 중 하나인 교양 프로그램은 환경에 제약 받지 않고 매번 두 시간을 넘기며 생각할 거리를 잔뜩 안겨줬다. 농촌과 농업의 현실, 국가 폭력, 생태주의와 탈핵, 대학의 공공성 등을 주제로 총 네 번의 세미나가 마련됐는데 그 여파인지 밤에 있었던 술자리에서도 틈만 나면 토론이 펼쳐지곤 했다. 오가는 이야기와 고민, 짬짬이 연습했던 마임(민중가요에 맞춘 몸짓) 그리고 나눠 먹었던 밥과 수박화채 등은 농활에 더욱 풍성한 즐거움을 줬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 농활대원들은 대책위 사무실에 모여 해단식을 가졌다. 다시 만난 이계삼 사무국장은 밀양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는 것이 농활임을 강조했다. 그는 “송전탑을 단순히 밀양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며 “우리 삶에 맞닿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자기 해방의 과정이 된다”고 말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농민이 대다수도 아니고 농민에 관한 문제가 사회 문제의 중심도 아니다. 1970, 80년대와는 다른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농활 역시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사회 구조 아래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소통하며 진실을 마주하고, 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한다는 연대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이번 농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대중 농활과 사회 운동적인 농활을 조화시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전에 농활의 성격과 밀양의 정치성을 알리기 위한 '농활 학교'가 두 차례에 걸쳐 열려 기조가 소개됐지만, 농활대원 서동석 씨(사회복지학과·16)는 “농활 학교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일정의 대부분이 반송전탑 투쟁과 관련돼 예상보다 정치색이 짙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마지막 밤 평가와 반성 시간에도 ‘평소에 생각했던 농활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꽤나 나왔다. 농활 학교를 아예 참여하지 않은 농활대원도 여럿 있었는데, 최근 주류를 이루는 농촌 체험형 농활을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운 전개였을 것이다. 뚜렷한 방향성을 갖는 활동이었던 만큼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농활의 성격에 대해 안내했었다면 그들에게도 훨씬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농촌에서의 MT로 전락해가는 농활을 다시 한 번 고민하고 ‘농촌’보다는 ‘농민’과 ‘연대’에 집중했던 이번 농활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곳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과 떠오르는 감정, 그로 인한 관점의 전환과 행동의 변화가 충분히 가능했던 경험이었다. 몸은 고됐지만 그러한 순간에 머리와 가슴에 찾아오는 울림, 농활대원 서로 서로간 쌓이는 유대감, 트럭 뒤 짐칸에 타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산골짝의 해질녘 등 그 고단함을 보상해줄 것들은 수 없이 많았다. 농활 참여를 한 번쯤 고민해봤던,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농활은 꼭 한번 해볼만한 일’이라 말해주고 싶다.

*행정대집행: 행정상 강제 집행의 일종으로, 의무자가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행정청 혹은 제3자를 통해 그 의무 내용을 실행하는 것.

사진제공: 사회대 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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