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빈 교수 (행정대학원)

몇 년 전 일이다. 얼굴이 하얗고 매우 성실해 보이는 김 군이 학기 초에 연구실에 찾아왔다. 행정대학원에는 철이 든 대학원생만 있으니, 학생들이 교수들을 어려워하는 편이다. 그런데 김 군은 달랐다. 나와의 지연, 학연 등 온갖 것을 얘기하며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학기에 내 과목을 수강하면서 강의시간 전후에도 찾아온 것 같으니 매주 한 번꼴 만난 것 같다.

수많은 대화 중 당시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제 또렷이 기억나는 말이 있다. 자기가 “지금까지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고, 자기의 목표는 수석졸업”이라는 것이다. 우리 행정대학원에서는 대학원 출범 시부터 수석졸업이란 제도를 시행해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돋는 전통이 있다.

내 수업은 세미나 식으로 진행되고 학생들의 발표와 수업 참여도가 중요한 평가 항목이었다. 매주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사례발표를 하고 그에 관해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그런데 김 군의 발표는 초점도 엉뚱했고, 그 내용도 부실했다.

당혹스런 사건은 학기 말 성적공개가 된 후에 일어났다. 그 학생에게는 C+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 학생은 연구실 바닥에 덥석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교수님, 살려주십시오”를 반복했다. 얼굴이 창백해져 혼이 나간 사람같이 중얼거렸다.

나는 다가가서 “얼른 못 일어나. 내가 너 죽였나?” 고함을 질러 일단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학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추가 리포트 등 무엇이든지 할 테니 A를 달라는 애원일 뿐이다. 그러나 난 다른 학생과의 공정성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리고 “학점이라는 것이 인생에서 그렇게 죽고 살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정말 진심으로 타일렀다.

일단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그 사건은 충격이었다. 그 후 며칠은 ‘그놈의 학점이 뭐길래, 장래가 촉망되는 그 학생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나?’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남달리 공부를 잘 해보려는 학생이라는 점에서 내가 너무 하지 않았나’라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런데 몇 달 후 우연히 다른 교수님들과 환담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학생이 나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름 깐깐하기로 유명한 그 교수님은 그 학생에게 굴복한 모양이다. “역시 임 교수는 독하다”란 말을 통해서 짐작하면 말이다. 행정실 직원들을 통해서도 유사한 정보를 얻었다. 그 학생은 수강신청 변경 기간 시 행정실을 수없이 드나들며 어느 교수님이 학점을 잘 주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여러 번 수강 변경을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한마디로 A 학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하는 학생이었다.

오늘 다시 이 학생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진 것은 봄학기에 담당한 학부 수업 때문이다. 학기 말 성적이 공개된 이후 몇 학생들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 요지는 “중간고사에서 나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가 자신보다 더 좋은 학점을 받았는데,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 학점이 나쁘게 받은 학생들도 아니니 오히려 “한 학기 동안 많이 배웠고, 좋은 학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씁쓸했다. 더구나 자신들의 기말고사 성적도 모르고, 수업참여도 점수도 모르는 상태에서 A를 달라고 ‘항의’를 하니, 김 군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이 수강신청 하는 유일한 기준이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가 든다. 학생들이 학점에 민감하니 학점 인플레가 일어나고 있다. 대학원진학,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점을 잘 따려 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친 학점 집착은 잘못됐다고 본다. 그래서 난 각종 면접시험 시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준비한 듯 답을 술술 얘기하고, all A 학점에다 ‘수석졸업’이라는 수험생을 보면 김 군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근히 동료면접위원들에게 ‘저 학생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많은 면접위원은 내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이제 면접위원의 일은 겉포장만 완벽한 제품보다는, 어딘가 채울 것이 필요한, 인간미 넘치는 사람을 고르는 일인 것 같다. 시험 준비에 찌든 고등학교 때 같이 대학 시절을 보내니 안타까운 일이다. 학점 따는 기계와 같은 학생들이 졸업 시까지도 진로를 고민한다. 이제 학점관리 차원을 떠나서 B, C 학점을 받더라도 새로운 도전이 될 과목을 수강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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