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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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신문
  • 승인 2016.08.28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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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준 석사과정 (사회학과)

서울대는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므로 당연히 위기의 인문학에 더 큰 지원을 해야만 하는가? 연구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답이 달라질 것이다. 대학이 상아탑이던 시절의 논리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고 전문적 수련과정을 거친 학자가 자체적-폐쇄적으로 그를 발견해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용주의와 구성주의의 시대에 이제 진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필요 및 욕망과 구분될 수 없는 것이 됐다. 베버는 연구자가 분석과 방법론에 있어서는 가치중립적이고 연구 목적, 주제, 대상 설정에서는 가치개입적인 이중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아탑의 시대는 끝났다. 구상과 실행은 분리되고 구상은 연구비를 대는 바깥 주인들이 하는 것이 된다.

대학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고 이제 대학의 운영에는 큰돈이 들어간다.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그만한 재정을 지원할 수 있는 주체는 기업과 정부 단 둘뿐이다. 대학에서는 이들을 각각 산(産), 관(官)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각각 공학과 정책학 연구의 주인이 된다. 그러니 물적 토대를 지닌 이 학문들이 대학 내에서 큰 위상과 비중을 갖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문학은 위축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산, 관이 인문학과 결합할 가능성은 없는가? 기초학문으로서 인문학의 효용을 주장하는 많은 논의는 그것이 목적 설정, 가치지향 및 판단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기업과 정부는 명확한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기에 인문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목적과 가치지향을 공고하게 갖는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수단이다. 인문학은 목적 및 가치지향 문제를 두고서 오히려 산, 관과 경쟁하는 학문이고 그 결과로 기초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자신의 물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다수 시민들과 인문학 사이의 접점을 찾으며 대학 바깥에서 공부와 연구를 수행하는 인문학자 집단과 그들의 실천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상 유일한 구조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적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 학술적 엄밀함을 포기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독이 될 뿐이라는 우려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문학-시민 결합의 일시적 미성숙일 뿐이다. 세계적인 인문학자 미셸 푸코의 경우 그의 후기 사상은 시민 일반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에서의 강의로 형식화됐고, 이는 분명 비전문가 시민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이는 그 사회와 학문의 수준의 문제일 뿐이다. 지식사회학이 발견했듯 연구는 그 주인을 바깥에 따로 둘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산, 관에게 필요 없는 인문학이 바깥 주인으로 둘 수 있는 것은 이제 시민영역뿐이다. 우리시대의 시민 다수는 소위 중산층적 삶의 허상 이외에 모든 삶의 의미,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끊임없이 소외와 허무를 경험하고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인문학이 스스로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효용이 정말로 있다면 다수 시민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파트너이고 그를 통해 자신의 물적 토대를 재구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청중으로서의 수요를 어떻게 창출해낼 것인가이며, 이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인문학자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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