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혁명을 노래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

 
▲ © 강정호 기자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1904~1973)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 시인.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등의 연애시부터 민중주의에 입각한 선동시 「해방자들」까지 폭 넓은 작품세계를 가진 시인으로 평가된다.  스페인 내전 당시 동료 시인들의 처형과 옥사를 목격하면서 이전의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시 세계에서 벗어나,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독려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했고, 상원의원에 당선돼 정치인으로도 활약했다. 서정시뿐만 아니라 참여적이고 민중 지향적인 그의 시는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받았으며, 주요 작품에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모든이들의 노래」,  등이 있다.

시가 날 찾아왔다 -파블로 네루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가였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난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길에서

그 곳에서 나의 마음은 움직였다




지난 9월 23일(목) 인문학 연구원과 스페인 중남미 연구소 주최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에서는 네루다의 삶과 시의 관련성을 분석하고,  네루다가 한국 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네루다의 삶에 투영된 문학」을 주제로 발표한 박병규 강사(고려대ㆍ국제어학원)는 네루다의 회고록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다』를 통해 그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했다. 그는 “네루다는 1920년대 칠레 문단에서 높게 평가받지 못했던 시와 시인을 존경의 대상으로 바꿨다”며 “시뿐만 아니라 쿠데타, 스페인 내전을 거치며 칠레의 상원의원으로서 민중을 위한 사회 변혁을 주창했던 그의 삶이 호소력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기순 교수(한국외대ㆍ서어서문학과)는 「네루다,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정서적 하이퍼리얼리즘」을 발표했다. 전 교수는 “예술 생산자가 개혁을 위해 만든 정치적 선전은 수용자에게 ‘의식’을 부여한다고 전제한 마르크스 문학론의 관점에서 보면 네루다의 시는 정치적 선전이 아니다”라며 네루다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다. 그는 “네루다의 시가 무산 계급의 고백, 노동운동을 담은 정치적 선전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독자가 그의 시를 읽을 때 새로운 ‘의식’을 부여받기 보다는 ‘감정’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정치적 선전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친밀함 뒤의 낯섦: 한국 속의 네루다」를 발표한 김현균 교수(서어서문학과)는 “한국에서 네루다는 그를 모델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 등 문학 외적 경로를 통해 알려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시가 선집의 형태로 소개되거나 상업성을 고려한 사랑의 시편만 소개되고 대표작인 「이 땅에 살기」와 「모든 이들의 노래」 등은 번역되지 않아 네루다 의 작품 세계를 왜곡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김 교수는 네루다 시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시인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김남주는 민족해방을 주요과제로 삼은 남미 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며 네루다의 시 「해방자들」과 김남주의 시 「전사 2」를 비교했다. 또 그는 “네루다 시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부각시킨 김남주와 달리 추상성을 거부하고 물질세계에 파고들었던 네루다 시의 또 다른 특성에 주목한 시인이 정현종”이라고 말했다. 그는 네루다의 「양말을 기리는 노래」와 정현종의 「부엌을 기리는 노래」를 통해 시상과 형식의 유사성을 보여줬다.

발표가 끝나고 이번 행사에 참여한 칠레 대사관의 곤살로 피게로아 영사가 네루다의 대표시 「시인 엘 포에타(EL Poeta)」를 스페인어로 낭송해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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