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르포] 문화가 스며있는 그 상가에 가다 - ① 국제전자센터

 

 

진동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콘솔게임부터 목소리에 화음을 더해주는 기타,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한 벌의 옷까지. 많은 것들이 데이터화 돼 무형으로 떠도는 이 시대에도 문화를 향유하려면 사물화된 하드웨어가 필요하고, 그 바탕엔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형성된 문화 관련 상업밀집지역, 즉 상가들이 있다. 콘솔 게임 ‘덕후’들의 보물창고 국제전자센터, 음악인의 젖줄 낙원상가, 그리고 패션계 터줏대감 동대문 패션상가까지. 이번 연재 기획에선 추억을 간직한 상가들을 찾아가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을 그려내고자 한다.

 

① 국제전자센터 ② 낙원상가 ③ 동대문 패션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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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터미널역 개찰구를 지나 한쪽 끝에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국제전자센터’(국전) 간판이 보이고, 곧 매장들이 빼곡히 모인 옛 상가 풍경이 펼쳐진다. 13층까지 있는 상가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한 층씩 천천히 매장 풍경이 펼쳐지고, 카메라, MP3, 선풍기에서부터 컴퓨터 부품까지 온갖 전자제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참 올라가 9층에 다다르니, 잰걸음을 놀리며 게임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직원들의 활기찬 인사 소리에 금세 생기가 돈다. 각종 콘솔 게임부터 피규어, 캡슐토이까지 가게마다 빽빽이 채워진 이곳은 국제전자센터다.

 

국제전자센터, 게임 시장에 나타난 혜성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5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현재 약 11조원 규모의 국내 게임 시장에서 온라인 게임의 매출액은 약 6조원으로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90년대 후반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가 흥행하면서 PC방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가정 인터넷 보급에 일조해 온라인 게임 시장을 선도하기도 했다. 스타크래프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우), 리그 오브 레전드(롤)에 이어 오버워치까지 인기 해외 게임들이 온라인 게임 일색인 것 역시 우리나라 시장에서 온라인 게임의 위치를 보여준다. 이 뒤를 이어 모바일 게임이 크게 성장하고 있고, 비디오(콘솔) 게임은 겨우 천 억원을 넘긴 규모로 전체 게임 시장의 10퍼센트를 밑돌고 있다.

체험관에 구비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하는 방문객의 모습

국전이 지어진 것은 온라인게임이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인 97년이었다. 소위 ‘용산 던전’(용던)이라 불리는 용산전자상가가 먼저 전문 상가로 자리 잡은 시점에서 ‘전자복합단지 계획 상가’로 건물이 지어졌고, 9층엔 콘솔 게임 보따리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온라인 게임 시장에 밀린 좁은 콘솔 게임 시장 안에서도 국전은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 가며 입지를 다졌다. 게임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파는 다른 대형 상가에서 임의로 값을 부르는 일이 흔했던 만큼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는 입소문은 많은 게이머가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됐다. 방문객 최우석 씨는 방금 구매한 플레이스테이션 타이틀 ‘헬다이버스’를 안고 “다른 곳에 비해 믿음이 가는 편이라 국전을 찾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국전이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상가 상권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문을 연 지 15년이 넘었다는 지하 1층 부동산의 정주남 소장은 “19년 전에 지어진 후 오랫동안 상권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가게들이 월세 없이 관리비만 내는 조건으로 입주하기도 했다”며 “9층이 살아나고 몇 년 사이에 소자본으로 창업하는 사람이 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고 설명했다. 콘솔 게임과 비슷한 시기에 피규어 샵들도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국전 9층은 오늘날의 복작이는 모습이 됐다.

 

‘콘솔의 맛’ 아는 사람들, 국전으로 모이다

유명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평일 오후 시간에도 많은 사람이 9층을 돌아보고 있었다. 간이벽 사이사이로 옹기종기 몰려 있는 게임 매장과 다소 빛바랜 듯 보이는 간판들, 매장을 반 바퀴쯤 돌다 보면 반대편에서 봤던 사람을 다시 마주칠 정도로 크지 않은 규모는 어쩐지 친근한 느낌을 준다. 네다섯 바퀴쯤 돌다 보니 방향치인 기자도 어느 정도 매장의 위치를 외울 수 있었다. 진열장에 놓인 구형 닌텐도 DS와 게임보이는 동물의 숲에서 낚시하고, 희귀 포켓몬을 찾아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국전은 우리나라 콘솔 게임 시장의 하이라이트를 함께해 왔다. 우리나라 콘솔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진 계기였던 플레이스테이션2부터 엑스박스360, 국전 앞에서 첫 출시 돼 대란을 일으킨 플레이스테이션4까지 국전의 진열장에선 국내 콘솔 게임의 역사가 펼쳐진다. 2013년 말 플레이스테이션4 대란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다. 소니 본사에서 7년 만의 신제품 플레이스테이션4를 국전 건물 앞에서 한정 수량으로 선보여 손님들은 며칠 동안 간이 텐트에서 먹고 자며 줄을 서서 구매하기까지 했다. 한정 수량이 동난 뒤 국전 매장에 갖춰진 것도 금세 매진돼 손님들의 아우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9층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A씨는 “플레이스테이션4는 출시 이후로 지금까지도 핫한 게임기”라며 “판매량 산출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콘솔 게임의 메카처럼 자리 잡은 이곳엔 구비된 게임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일산에서부터 친구끼리 온 대학생들, 어린 남매를 데리고 놀러 온 부모님, 학교가 끝나고 게임을 사러 들른 고등학생 등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고 찾는 경우도 많다. A씨는 “꾸준히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릴 때 게임을 즐기다가 자라서 구매력을 갖춘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각자 슈퍼마리오 칩과 요괴워치 칩을 들고 사이좋게 걸어가는 한 부자의 모습이 유달리 정겨워 보인 것은 이 때문 아니었을까.

잠시 손을 풀고 즐기고 싶은 게이머들을 위해 게임을 직접 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직진하면 오른편에 보이는 ‘체험관’이 바로 그곳이다. 플레이스테이션 비타와 플레이스테이션4가 각각 4대씩 놓인 이곳에선 호러, 무협, 액션 어드벤처 게임 등을 직접 해볼 수 있다. 게임을 꿰뚫고 있는 듯 능숙하게 클리어하면서도 “입시 끝나자마자 살 거다”라고 아쉬워하며 잠깐이나마 스트레스를 푸는 고3, 캐릭터가 죽자 아쉬워하는 중국인 관광객, 기자가 9층에 도착했을 때부터 취재를 끝나고 돌아갈 때까지 무협게임의 대사를 읊으며 몰두하던 ‘덕후’까지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이들을 따라 기자도 플레이스테이션 앞에 서서 ‘레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츄바카로 변신해 여기저기 폭탄을 투척해보고, ‘언차티드4: 해적왕과 최후의 보물’의 영상미에 감탄하며 주인공의 형 샘을 따라 벽을 타고 도망 다니다 3분 만에 추락사하기도 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속 ‘최애’를 만나다

그렇지만 국전을 게임 ‘덕후’만의 장소로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게임 매장들을 지나 걸음을 옮기다 보면 광이 날 정도로 투명하게 닦인 유리 진열장 속에 캐릭터들이 한가득 자리 잡은 피규어 샵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보컬로이드부터 러브라이브, 원피스, 드래곤볼 등 손에 잡힐 듯한 크기부터 수십 만원을 호가하는 큰 사이즈의 건담까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피규어들을 볼 수 있다.

국전의 피규어 매장들은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기 시작해 차츰 수가 늘어났고, 그 결과 현재 9층은 게임매장일 뿐 아니라 도쿄 아키하바라를 연상시키는 피규어의 성지가 됐다. 피규어 산업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6년 콘텐츠사업 전망’에서 20% 가량 성장했다고 밝힌 캐릭터 산업의 일환으로, 특히 올해 1조원의 시장 규모를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유망 분야인 키덜트 산업에 속해 있다. 비교적 폐쇄적인 오타쿠 문화와 이에 대한 과거의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아직 국내 산업 규모가 정확히 추정되지 않아 실제로는 더 클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화면 속 캐릭터들이 손에 만지고 수집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피규어, 그중에서도 게임과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피규어와 관련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 국전은 ‘덕후’들에게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현실 속에서 다시 만나게 해 준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음지 문화로 불리면서도 진열장을 빼곡히 채워나가게 된 피규어는 점점 다양한 장르의 캐릭터를 높은 퀄리티로 보여주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매장을 돌아보다 레이싱복을 입고 오토바이 앞에 선 보컬로이드 캐릭터 ‘하츠네 미쿠’의 피규어 앞에선 정교한 관절과 레이싱복의 디테일, 캐릭터 특징이 드러난 모터사이클의 모습에 절로 발길이 멈춰지기도 했다. 피규어 샵 운영자 B씨는 “예전 피규어는 도색이나 마감이 정교하지 못했지만 3D 프린터 등 기술이 도입되며 퀄리티가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B씨는 품목의 범위도 넓어졌다고 덧붙였다. 라이센스 산업이 발달하면서 과거에는 원피스나 드래곤볼 등 유명한 장르 위주로만 피규어가 출시됐지만, 이제는 방영된 애니메이션이라면 거의 해당 피규어를 찾을 수 있다.

피규어 샵은 덕후에게는 물론 우연히 국전을 찾은 방문객들에게도 즐거운 구경거리가 된다. 구하기 어려운 피규어를 사러 바다 건너온 관광객부터, 예술의 전당 가는 길에 잠깐 구경하러 들른 커플, 고장 난 핸드폰을 맡기러 왔다 귀여운 피규어를 보고 감탄하는 모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잭슨 씨는 “일본에서 찾지 못한 피규어를 이곳에서 찾았다”며 뿌듯한 표정으로 쇼핑백을 들어 보였고, 캐나다에서 온 크리스틴 씨는 “오늘이 세 번째 방문”이라며 “다른 비슷한 곳들보다 다양한 캐릭터 상품이 있어서 좋다”고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피규어 매장을 운영하는 C씨는 “피규어 매장을 찾는 성별과 연령층이 2~3년 사이에 훨씬 다양해졌다”며 “키덜트나 오타쿠 문화를 미디어가 흥미롭게 비춰준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덕후’들이 주목받고 ‘덕질’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면서 오프라인 상점도 점차 늘어났다는 것이다.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최근엔 피규어와 관련 서브컬쳐를 체험해볼 수 있는 매장도 생겼다. 9층 한구석 검은 외관, 큰 스크린 두 개와 테이블이 놓인 매장을 운영하는 진준호 대표는 이곳을 ‘프로모션 부스’라고 소개한다. 가상 아이돌 ‘러브라이브’에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을 열었다는 그는 러브라이브 굿즈를 위탁해 판매하고, 방문한 사람들에게 과자를 주며 편하게 홍보 영상을 보고 갈 수 있도록 한다. ‘26년 동안 덕질하면서 러브라이브처럼 재미있는 게 없었다’는 그는 기자에게 일본 과자를 건네며 “지난 2년 동안 14번 일본에 다녀왔다”며 “아이돌과 비슷한 장르라 굿즈 종류도 다양한 것이 특징”이라고 러브라이브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했다.

작은 가게에도 다양한 장르의 피규어와 인형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추억의 콘솔 게임 마니아부터 애니메이션 덕후까지, 국전이 열어준 ‘덕질’의 범위는 넓디넓었다. 구경거리를 찾는 손님에게는 전시장이, 콘솔 게임을 꾸준히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지트, 피규어 수집가에게는 천국이 돼 주는 이곳은 단순히 게임기와 칩, 모형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다. “그림이나 도자기 모으는 것처럼 이쪽(피규어, 게임)도 하나의 좋은 취미”라고 말한 한 피규어 샵 대표의 말처럼, 국전은 좋아하는 것을 모으는 소소한 즐거움과 추억을 파는 곳으로 이어져갈 것이다.

 

사진: 강승우 기자 kangsw0401@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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