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쓰였으면 모두 금서

 
▲ © 강동환 기자

 

일제강점기의 금서는 일제의 언론ㆍ출판 탄압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립에 대한 의지가 서적을 통해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일제강점기의 금서정책은 말기로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1920년대에는 주로 애국의식을 고양시키려는 민족주의 서적이 금지된 데 이어 3ㆍ1운동 이후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이 증가하자 사회주의 서적까지 금지됐고,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를 찬양하는 사상이 담긴 서적 외에는 대부분의 한글 서적이 금서가 됐다. 역사학자 이중연씨는 “일제강점 말기에는 단지 민간에서 많이 읽힌다는 이유로 금서가 될 만큼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금기시됐다”고 말한다.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 초기까지의 금서는 구국계몽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주의 서적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예로 현채의 『유년필독』과 신채호의 『을지문덕』을 들 수 있다. 『유년필독』은 역사ㆍ지리ㆍ인물ㆍ풍속ㆍ종교 등을 다루면서, 청ㆍ러시아ㆍ일본ㆍ미국 등 당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가들에 대한 평가도 곁들인 대한제국기의 아동용 교과서다. 특히 “우리청춘 소년들아 우리나라 독립하세,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나라 어이하여 이 지경”을 반복하는 「독립가」를 실어 국권회복과 애국의식을 강조하고 있어 1만부가 발행될 정도로 청ㆍ장년층에까지 널리 읽혔다. 국난을 극복한 영웅의 전기를 통해 자주독립정신과 저항의식을 높이려한 『을지문덕』은 경술국치 직후 금서 처분 당했다. 1884년부터 1920년까지의 항일투쟁사를 기록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금서다.

 

이처럼 일제는 1920년대까지 많은 민족주의 서적을 압수하고 출판을 금지했는데, 3․1운동 이후의 출판계를 살펴보면 출판물의 수는 증가한 반면 공식적인 금서는 10여 종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기만적 문화통치 아래 사실상의 검열과 사상통제가 강화돼 금서로 지정될 수 있는 민족주의 서적의 출판 자체가 봉쇄 됐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는 독립운동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민족주의 관련서적 뿐 아니라 사회주의 관련서적의 출판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이 식민통치에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일제는 사회주의 서적도 대대적으로 금지하기 시작했는데, 카프의 문학적 성과를 모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시집’으로 평가받았던 『캅프시인집』도 금서 중 하나이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통계로 논증한 『숫자조선연구』 또한 금지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는 역사ㆍ전기류, 소설까지 금지되는 등 금서로 지정된 서적 종류가 늘어났고, 한글서적을 읽는 것 자체가 금지됐다. 특히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에 맞춰 황국신민화․내선일체 등 일제를 옹호하는 사상을 담은 출판물 외에는 모두 금지했다. 신교육사상, 자유연애사상 등을 담은 이광수의 『무정』이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됐을 당시에는 문제시되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금서 처분된 것만 보아도 일제의 금서 정책이 강점 말기에 더욱 가혹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금서정책은 1910년대의 무단통치, 1920년대의 기만적 문화통치, 1930∼1940년대의 민족말살통치 등 일제의 식민통치방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금서 정책의 전반적인 특징에 대해 한기형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는 “일제는 도서관, 책방 등을 수색해 서적을 압수하는 일반적인 금서 정책 외에도 출판법과 식민지법의 법률체계를 통해 근본적으로 출판이 힘든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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