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가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친일 행적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 타이틀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것은 아마도 한국 최초의 근대장편소설인 『무정』의 저자라는 점일 텐데, 이는 그것이 이광수를 한국 현대문학의 상징적인 기원으로 규정해주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이 당신을 조금 당혹스럽게 만들었는가. 지난 백 년 간의 한국 문학이 실상 친일 문인의 펜 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니. 그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한 건 비단 당신만이 아니다. 오래 전 김현 역시 이광수를 두고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고 말한 적 있다. 게다가 얼마 전 한국문인협회 원로들은 『무정』 출간 백 주년을 기념해 춘원문학상을 제정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는 곧장 철회한 실로 당혹스러운 사태를 벌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 『무정』의 줄거리가 실은 뭇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던 삼각관계 스토리의 정석이라면. 이제 당신은 당혹감을 넘어서 모종의 배신감 같은 것마저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릇 ‘문학사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작품이라면 그 위상에 값하는 숭고하고 위대한 뭔가를 다루고 있으리라 기대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주인공 형식이 기생 영채와 부잣집 딸 선형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그런 빤한 내용의 연애 이야기였다니. 배신감에 떨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중얼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문학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던가.

『무정』이 거둔 엄청난 성공 뒤 이광수를 괴롭힌 것도 그와 같은 종류의 물음이었다. 이광수가 고백하길, 그에게 “웬 연애 이야기를 해서 청년들을 부패케 하느냐”는 투서가 날아드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로부터는 “소설은 무엇 하러 쓰느냐, 그런 것도 조선에 도움이 되느냐”와 같은 책망을 듣기까지 했다. 식민지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성공의 무게는 새삼 가혹했다.『무정』이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동안 청년 문사(文士) 이광수는 고작 그런 것을 문학이라고 하고 있느냐는 맹렬한 비난을 감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고작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이어야 했던가. 문학이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도덕적·정치적 책무를 수행하는 ‘위대한 문학’이길 요청받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쓰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던 시대. 하지만 이제 그 ‘위대한 문학’의 시대는 저물었고, 운동과 투쟁은커녕 시를 읽는 사람조차 드물게 된 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지난해 종간된 『세계의 문학』이 그것을 증명해줬다. 한때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과 함께 3대 계간지에 이름을 올리곤 했던 문예지조차도,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지면이었든 다만 문학사의 흘러간 풍경으로 남게 될 뿐이다.

『세계의 문학』을 대신해 얼마 전 새로 창간된 문학잡지의 아이돌 멤버 인터뷰를 두고 문단 안팎이 술렁거렸다. 문예지에 아이돌이라니 가당키나 하냐는 반응과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입장이 서로 맞섰다. 어느 쪽이 됐든 분명한 것은 앞으로 문학이라는 개념의 외연과 내포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바뀌어 갈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인 1916년, 이광수가 「문학이란 하(何)오」란 글에서 물었던 ‘문학이란 무엇(何)인가’에 대한 답이 바로 지난 백 년간 우리가 읽고 쓰고 음미하고 사랑해온 바로 그 문학이었다. 백 년 동안의 문학. 그리고 이제 다시 또 다른 백 년 동안의 문학. 문예지와 아이돌의 사뭇 낯선 병치는 다만 그것을 예비하는, 혹은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한 하나의 과장된 몸짓인지도 모를 일이다.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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