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 비틀어 받아치면 그만
혐오 발언, 비틀어 받아치면 그만
  • 대학신문
  • 승인 2016.09.04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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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혐오 발언 (주디스 버틀러, 유민석 옮김, 알렙 , 372쪽, 18,000원)

최근 대학가에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카카오톡 단톡방 성희롱 사건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여성혐오 발언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보여준다. 혐오 발언은 여성뿐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 특정 지역 등 대상을 국한하지 않고 자행된다. 특히 지난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기폭제가 돼 여성혐오를 비롯한 혐오 관련 논의가 급증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혐오 발언을 법으로 규제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규제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을 강조하는 한편, 규제를 옹호하는 측은 ‘절제되지 않은 자유’의 파괴성을 강조하며 표현의 자유에도 얼마든지 제한이 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젠더는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행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는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주디스 버틀러 교수(미국 UC버클리 비교문학과)는 『혐오 발언』을 통해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말을 비틀고 바꿔 저항하기

철학자 레이 랭턴과 법학자 마리 마츠다, 캐서린 매키넌 등의 학자들은 혐오 발언이 ‘그냥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닌 폭력이자 차별 행위라며 혐오 발언의 규제를 옹호한다. 혐오 발언이 수신자들을 열등하고 예속된 집단으로 못 박아 두는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라는 개념이 전제돼 있다. ‘발화수반행위’란 언어 행위는 항상 발화자가 의도한 효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효과를 수행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버틀러는 ‘발화수반행위’ 개념을 비판하고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ary act)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발화효과행위’는 언어 행위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뜻하는 개념으로 혐오 발언이 반드시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효과의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혐오 발언의 효력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혐오 발언과 상처 사이의 간극에 주목한 버틀러는 바로 그 간극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혐오 발언자가 애초에 의도한 맥락에서 탈피해 혐오 발언을 전유, 전복, 재배치함으로써 ‘저항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흑인에 대한 경멸적 용어인 ‘검둥이’(nigger)가 흑인 래퍼의 랩 음악 가사에 재배치되고, 동성애 공동체가 ‘퀴어’(queer)라는 욕설을 ‘퀴어 네이션’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함으로써 포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혐오 발언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흔히 혐오 발언은 권력을 가진 자가 이미 종속된 지위에 놓여있는 자를 재종속시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권력을 지닌 백인, 남성, 이성애자가 이미 종속적 상태에 있는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를 혐오 발언으로써 재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인종차별 발언을 비롯한 혐오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버틀러는 혐오 발언자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개별 화자에 대한 규제는 혐오 발언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혐오 발언의 역사성이 개별 화자에게 책임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혐오 발언이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개별 화자의 권력이 아닌 선행하는 관습의 반복을 통해 축적된 ‘말의 권력’ 때문이다. 즉 혐오 발언자는 혐오 발언을 창시한 기원적인 저자가 아니라 혐오 발언을 인용하는 파생적인 2차 저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혐오 발언자에게 처벌을 통해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적 문제를 개별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버틀러는 또 국가권력의 편파성과 자의성을 이유로 들며 국가권력을 통한 혐오 발언의 규제를 경계한다. 가치중립성을 결여한 국가가 무엇이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를 규정하게 된다면 권한 오용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이 같은 통찰은 민주화 이전 국가에 의한 사법 권력의 남용이 빈번했고, 현재에도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혐오 발언을 법으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전유, 전복, 재배치함으로써 혐오 발언에 저항해야 한다는 버틀러의 주장은 레이 랭턴, 리사 슈왈츠만 등의 학자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한다. 리사 슈왈츠만은 버틀러가 말하는 ‘혐오 발언의 재의미화를 통한 저항’이 쉬운 일이 아니라며 ‘퀴어’를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그는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오늘날과 달랐던 50년 전에 한 개인이 ‘퀴어’라는 용어를 단순히 재수행하거나 재의미화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을 거라고 지적한다. ‘퀴어’의 재의미화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가 뒷받침돼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이다. 버틀러의 논증을 악용해 “왜 반항하지 못하냐”라는 식으로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이 가해질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언어와 권력의 문제, 검열과 표현의 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철학적 사유를 펼쳐 보이는 이 책이 현재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혐오 발언의 비틀기는 많이 시도된다. 그중에서도 8월 16일자 「슬로우 뉴스」의 ‘여성 상위시대’ 기사는 여성과 남성의 처지가 정반대로 뒤바뀐 가상세계를 그리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여성 혐오 발언을 비틀어 제시한다. ‘여자는 목소리가 높으면 안 돼’와 같은 여성 혐오 발언을 ‘목소리 높은 남자는 공격적이고 위험한 남자’라고 되받아치는 식이다. 글쓴이는 ‘실화가 아닌 콩트일 뿐’이라며 글이 갖는 의미를 애써 축소한다.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여성 상위시대」는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닌 언어의 전유와 전복을 통한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이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법적 처벌보다 언어의 전유와 전복을 통한 저항이 희망적이고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로써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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