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즘과 세계화, 열쇠는 서구에?

9ㆍ11테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났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빌딩을 화염으로 갈라놓은 비행기, 감각이 아니라 추론을 통해서만 비극적으로 다가왔던 사람들의 낙하, 빌딩의 느릿한 붕괴, 싸이렌 소리, 희뿌연 먼지 속을 내달리던 사람들. 도대체 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테러 시대의 철학』은 그 물음을 기억하게 한다. 저자의 긴박한 목격담은, 그 때 우리를 스쳐갔던 물음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이 물음들을 통해 우리는, ‘재구성’과 ‘해체’라는 말이 단적으로 드러내듯, 도무지 한 데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철학자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한 곳에서 차례로 만난다. 하버마스와 데리다는 이 대담을 통해 학문과 정치의 견고한 경계의 틈을 헤집어 ‘정치적 입장을 철학적 입장의 하나의 보충물로, 즉 선택하거나 연기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거부할 수도 있는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간주하지 않는’ 대열에 합류한다.  

 

 

테러리즘, 근대성의 ‘바깥’인가 ‘이면’인가

 

하버마스는 9ㆍ11테러 이후의 현 시대를 ‘미완의 기획으로서 근대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틀로 해석한다. 근대성의 산물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근대성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인 문화와 만날 때도 작동하는가? 하버마스는 이 물음이 수반하는 근본적 회의를 단번에 떨쳐버리지만, 세계화의 강요로 이루어진 만남의 국면에서는 당분간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작동 불능이라는 점을 순순히 인정한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전지구적 테러리즘의 겉포장인 (종교적) 근본주의는 세계화가 강요한 근대성에 맞선 ‘방어적인 대항’이다. 세계화의 분열적 양상은 이를 강화하며, 세계화의 무대였던 전지구적 네트워크는 이의 활동무대가 된다(그러나 하버마스는 기술문명과 테러리즘의 관계를 충분히 전개하고 있지 않다. 이는 체계보다 생활세계에 중심을 두는 그의 입장에서 연원하는 듯 하다).

 

다른 한편, 데리다는 ‘해체’를 통해 현 시대를 진단한다. 해체란 어떤 것의 가능성(완성)의 조건이 바로 그것의 불가능성(미완성)의 조건임을 밝혀, 사태나 개념의 안정성 이면에 있는 균열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과 테러리스트, 근대성(기술과학)과 전지구적 테러리즘은 적대적이면서도 공생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이 관계에 ‘자가-면역’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테러리스트란 냉전 시대 미국 스스로가 길러낸 전사들이며, 이들이 사용한 무기는 바로 미국(근대성) 기술과학의 산물이다. 더 나쁜 것은 “고도의 과학기술이 ‘자가-면역’을 통해 언제나 숙명처럼 대량학살 무기로, 온갖 테러리즘으로 도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9ㆍ11테러는 미래에 도래할 최악의 사태를 보여주는 전조에 불과하다. 요컨대, 테러리즘은 하버마스에게서 근대성 ‘바깥’에 있는 것이라면, 데리다에게서는 근대성 자체의 ‘이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의 유산을 전유하는 두 방식 ‘관용’과 ‘환대’

 

 

진단의 차이는 전망의 차이를 낳는다. 하버마스는 문화들 간의 지평융합을 통해 근대성의 기획이 더욱 확장되리라 낙관한다. 물론 이 낙관의 근거는 ‘우리’(서구인)가 이미 경험한 근대성이다. 그러나 타문화 앞에서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대신 온정주의적 관용에 기초한 물질적 수혜가 우선적 조건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주목해두자. 반면 데리다는 타자를 자신의 경계밖에 두는 면역이 숙명적으로 자발적 자살(자가-면역)을 불러오리라는 음울한 전망 하에, 이 면역을 해제하는 것만이 자가면역의 도착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이상을 제시한다. 그는 이를 ‘무조건적 환대’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이상이며 도약을, 일종의 신앙을 요구한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는 계몽의 유산 위에서 주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나 동맹을 대안으로 간직한다. 또한 같은 서양 내에서도 미국과 ‘다른’ 유럽, 계몽의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유럽에서 새로운 질서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다. 어쨌든 두 철학자가 현실적 대안에 대해 서로 화해롭게 손을 맞잡은 모습은 사뭇 극적이다.

 

그러나 둘의 대안이 공히 서구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일말의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대화 과정에서 그들은 강박적으로 ‘유럽중심주의’를 ‘부인’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징후’가 아닌가?). 테러리즘은 문명충돌이 아니라 세계화 내부에 심연처럼 도사리고 있는 적대의 표출이다. 그러나 두 철학자에게서 해결의 열쇠는 어쨌든 서구의 결단(온정주의적 관용)과 개종(면역 기제를 해제한 새로운 종교)에 있을 뿐이다.

▲ © 대학신문 사진부

 김문수(철학과ㆍ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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