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영 책임학예사 미술관

얼마 전 문화면을 떠들썩하게 한 미술계 뉴스들이 있었다. 한 유명인이 다른 사람을 시켜 그린 그림을 팔았다는 대작사건에, 생존 작가의 것임에도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희비극적 위작사건 등이다. 물론 미술품에도 국제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상품으로 유통되는 사회·경제적 기능이 있기에 이런 문제들이 대두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들에 대한 보도를 통해 미술계 종사자로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술작품을 작품으로 만드는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예술적 고민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단 점이다. 숱한 스포츠 소식이나 먹방, 아이돌 스타의 화제들 틈에 그나마 간간히 회자되는 ‘미술’에 대한 내용이 끝없이 미술의 본질과 먼 연예계와 화랑업계 사이의 예술적으로 불모 한 영역에 머무르는 것은 미술 전공자와 비전공자 어느 쪽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판매가의 몇 분의 일 가격에 대신 그렸고, 점 하나가 더 찍히고 덜 찍혀서 진짜가 되고 가짜가 된다는 기사들은 미술 본연의 모습을 들여다 봐주지 않는다. 초중고 교과과정에서 미술의 비중이 축소되거나 생략되는 이 마당에, 이대로 가면 미술의 진정한 가치를 맛보고 공감하며 그 어떤 웹툰이나 짤보다 깊고 우아하게 나의 감성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될까 조바심이 난다.

미술 본연의 모습 또는 본질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본질로의 접근에 미술의 ‘경험’이 많은 단서를 제공해주리라는 것이다. 일상을 벗어난 미술관 전시장에 서서 감쪽같이 벽에 걸린 캔버스 속에 담긴 작가의 흔적과 마주하는 행위는 단순한 이미지의 감상을 초월하는 시간, 공간, 신체, 그리고 지적 입출력을 동원하는 총체적 경험이다. 수십 년전 이 캔버스 앞에서 화가는 어떤 생각을 하며 흰 캔버스를 메워 갔을지, 도대체 얼마나 그림 공부를 하면 이토록 자연스럽게 사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지 등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행위 중 하나인 회화적 표현에 대한 궁금증이나 신기함은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경험의 데이터를 만들어 간다.

필자는 전공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 한 미술작품과 기억에 남는 대면을 한 일이 있었다. 20여년 전 뉴욕의 한 미술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현대미술이 전시된 지하에서 두꺼운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으며 걷다 갑자기 벽만큼이나 거대한 추상표현주의 작품에 맞닥뜨리게 됐다. 눈앞에 펼쳐지는 짙은 무채색의 광활한 면적은 시각적 효과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강한 물질감으로 다가와, 신체를 에워싸는 환경으로 확장됐다. 동시에 그 표면은 회화적 영웅의 숨결과 손짓, 고민과 희열뿐만 아니라, 수백년의 역사를 짊어진 미술적 행보의 결과물임을 깨닫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작품은 평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말하는 회화의 틀 밖의 현실세계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예술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는 모던아트의 모순적 조건을 충족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캔버스 천의 보풀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기도 하고, 복도의 너비가 허락하는 한 멀리 떨어져 보기도 하면서 보낸 작품 앞에서의 십여 분은 필자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비전공자들에게 있어 미술의 경험이 갖는 특수성은 보다 큰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와 마주하는 일상, 사이사이를 채우는 스마트폰과의 관계, 전공서적의 압박이 하루의 대부분인 생활은 나름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율적 인생만이 목표가 아닐 수 있음을 짐작할 즈음 자신의 감각, 지성, 감정을 보다 풍부하게 할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걸그룹도 챙겨봐야 하고, 먹방도 놓치기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요구되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님을 깨닫는 현명함이다. 깨달음을 얻은 현자들을 위해 서울대엔 미술관이 있다. 부디 미술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고 자신에게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방문해 보시라 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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