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의 삶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었을 때 말이다.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을 것이다. 매일, 정해진 리듬에 따라 아우스뤼켄(나가다) 아인뤼켄(들어가다), 나갔다가 들어올 것이다. 일하고 자고 먹고, 아팠다가 낫거나 죽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저자는 그곳에서의 삶을 이렇게 간추려 적고 있었다. 삶에서 실로 비의적이고도 충만한 순간들을 덜어내고 나면 앙상하고 볼품없는 뼈대만 남게 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나갔다 들어왔다, 일하고 자고 먹고. 그러다가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삶. 지금 이곳에서의 삶은 그것과 닮아있는 것 같았다.

물론 저 짤막한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지금 이곳의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고통과 절망, 공포가 생략되어 있으니 이 삶과 저 삶을 단순히 맞견주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도 윤리적이지 않다. 다만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거나 소망하는 일,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키며, 반성하고 실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일들을 그만둘 때, 비유컨대 우리는 흡사 세계라는 거대한 수용소 안에 갇혀 인간 이하의 삶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엄중함만은 거듭 새겨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비유로만 그치지는 않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며칠간 한 시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어쩌면 그것은 이미 지금 이곳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기가 채 식지도 않았을 사람의 몸을 헤집겠다고 나서는 공권력의 행태는 얼마나 야만적이었던가. 기각된 부검 영장을 거듭 다시 신청하는 고집스러움은 또 어떠했고.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단지 책임론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SNS와 포털사이트에는 고인(故人)을 두고 ‘선동꾼’이니 ‘빨갱이’, ‘폭도’니 하는 천박한 언사가 난무했고, 그런 ‘비국민’의 죽음을 애도하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이들도 있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비정한 장면들 위로, 유대인과 집시는 ‘비국민’이니 그들의 생(生)은 절멸되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했던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졌다. 소름 끼치는 오버랩이었다.

국가의 번영과 체제의 질서, 기업의 이윤을 위해 어떤 이들의 생명은 존중받지 못하는 일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어떤 이들이 바로 고(故) 백남기 농민이었고,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들이었으며,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온당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으므로. 생명과 죽음의 무게가 소각장에 남은 한 줌의 재만큼 가벼운 곳이 수용소라면, 지금 이곳은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하건대 수용소의 삶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제 우리가 용납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졌다.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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