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미국 대선 1차 토론을 인터넷 생중계로 지켜봤다. 잠깐 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토론이 끝날 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후보자들의 정책 논의가 흥미를 유발했기 때문이라거나 트럼프 특유의 말투와 제스처가 재밌어서가 아니다. 어떻게 트럼프라는 인물이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돼 저 자리에 서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보니 토론이 끝난 것이다. 토론에서 사용한 마이크에 문제가 있었다며 불평하고, 남들 다 자는 새벽 트위터에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진지한 면모를 찾아보긴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라는 외피가 담고 있는 내용물은 진지하다. 바로 변화에 대한 열망이다. 미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중산층의 붕괴가 빠르게 진행됐고 부의 편중이 심해졌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 벼랑에 내몰리고 있는 99%의 절망, 이런 소득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만들었다.

한국사회에도 언제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적 인물이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이미 선동가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은 충분히 마련돼 있다. ‘2016 경제민주화 심포지엄’에 참석한 패널들이 각종 자료를 통해 지적한 바와 같이 소득의 양극화, 이에 따른 의료, 교육 기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지만 양극화 해소에 있어 핵심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재벌개혁은 난망하다. 특별대담에 나선 김종인 의원은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추세대로라면 재벌로 대표되는 경제세력의 힘이 비대해져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헌법에 ‘경제의 민주화’ 구절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나 정치의 무능 혹은 무관심 속에 헌법의 ‘경제의 민주화’ 구절은 퇴색했고 재벌은 강력한 권력 집단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현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2012년 대선에서 덕을 톡톡히 봤던 경제민주화 의제는 대선이 끝나고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정치용어화된 경제민주화는 점점 공허해졌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경제민주화가 선거구호로 등장했다. 이번 대선 정국은 경제민주화의 구호에 실질적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큰 기대는 걸지 않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결국 정치에 있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다시 5년 뒤, 그 다음 대선정국의 시점에도 양극화 문제의 해결에 진전이 없고 국민들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면, 한국판 트럼프가 등장하는 악몽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결할 것인가, 선동가에 의해 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인가? 슬픈 예감이 드는데 이 예감이 틀리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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