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이용신 성우

부모님을 여의고 외할머니의 손에 자라며 가수의 꿈을 키워온 12살 소녀 루나. 그러나 목에 생긴 악성종양은 그의 꿈마저 좀먹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사신들에게 자신이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전달받은 루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미련으로 슬퍼하고, 사신은 1년 동안이라도 가수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루나를 16살 가수 ‘풀문’으로 변신시켜준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한 번쯤 꿈꿔보는 줄거리와 환상적인 노래로 방영 당시 초등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니메이션 「달빛천사」는 주인공 루나뿐만 아니라 데뷔 2년 차 신인 성우 또한 일약 스타덤에 올려놨다. 이후 각종 애니메이션 더빙뿐만 아니라 삽입곡까지 소화하며 ‘노래하는 성우’라는 타이틀을 얻은 성우 이용신 씨. 캐릭터 뒤에 숨어있던 그의 진짜 목소리를 들어봤다.

"성우는 죽어있는 캐릭터에 목소리로 생명을 부여해요" 이용신 성우는 목소리만으로 캐릭터의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더빙의 매력을 설명했다.

목소리가 특출났던 소녀, 꿈을 찾아 헤매다

다양한 직업을 탐색하며 꿈을 좇던 어린 시절의 그가 처음으로 성우라는 직업을 알게 된 때는 「블루문 특급」 「V」 등 더빙판 외화가 한창 유행했고 소년잡지에선 성우 특집 기사를 싣던 시절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용신 성우는 “외국인 목소리를 우리나라 사람이 대신 내주는 직업이 성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성악가, 아나운서, 변호사, 기자에 이르기까지, 비록 학년마다 꿈이 바뀌던 아이였지만 그의 꿈들엔 모두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전달해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용신 성우의 취미는 카세트테이프에 직접 소설이나 시를 낭독해서 녹음한 후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녹음한 목소리를 들으면 어색해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녹음된 목소리가 훨씬 예뻐서 테이프를 엄마에게 들려주며 자랑하기도 했다”고 웃으며 고백했다.

마이크를 잡고 말하거나 노래하는 직업을 가지리란 확신이 있었던 그는 계속 바뀌었던 꿈만큼이나 다양한 일을 하게 된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중인 1998년 우연히 제1회 ‘슈퍼보이스탤런트 선발대회’에 참가해 대상을 거머쥐며 이름을 알린 그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유명한 카피의 초코파이 CM송을 부를 기회를 잡았다. “CM송을 부른 후 광고 멘트까지 같이 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멘트를 치는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는 그의 말마따나 넘치는 광고들 속에서도 그의 남달랐던 재능은 빛이 났다. 광고계에서 활약하던 그는 홈쇼핑에 직접 나가 제품을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곧이어 LG홈쇼핑의 쇼호스트로 정식 입사하게 된다. 드디어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일에 가까이 다가간 듯한 순간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좌절이 닥쳤다. “방송이 하고 싶었지만 입사하자마자 들은 첫 마디는 ‘여긴 방송국이 아니라 유통 회사’였어요.” 이용신 성우는 “매출에 대한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심했다”며 “결국 우리 팀이 가장 낮은 매출을 기록해 회사에서 잘렸다”고 새로운 길을 고민하게 된 당시를 털어놨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유레일 패스, 가이드북, 항공권 딱 세 개를 들고 훌쩍 여행을 떠났고 스위스 인터라켄에서의 번지점프로 좌절감을 모두 털어내 버렸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함께 광고 녹음을 하며 친분을 쌓았던 동료 성우의 제안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투니버스에서 노래와 연기가 모두 가능한 성우를 뽑으니 도전해보라는 제안이었죠. CM송 가수로 활약하며 쌓아온 노래 경험이 다른 성우와 차별화될 지점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노래하는 성우’의 탄생

지원 마지막 날, 마감 시간 1분 전에 원서를 접수한 이용신 성우는 최종 면접에서 장점인 노래를 보여주며 당당히 2003년 투니버스 공채 5기 성우로 발탁됐다. 갓 데뷔한 신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단역뿐이었다. 첫 더빙에서 ‘여학생1’ 역할을 맡았다는 그는 “그 역할도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입 모양과 대사 길이를 맞추는 것이 가장 어려워 굉장히 짧은 대사 하나를 죽도록 열심히 연습했다”고 이용신 성우는 첫 더빙의 기억을 떠올렸다.

여러 직업을 거쳐 성우라는 길에 도달했지만, 그는 거쳐 온 모든 직업 중 그 어떤 것도 성우 일에 도움이 안 되는 직업이 없다고 강조한다. 여학생1에 이어 그가 맡은 역할은 애니메이션「행복한 세상의 족제비」의 라디오 기상캐스터 역할이었다. 그는 “쇼호스트로서의 경험을 살려 자연스럽게 대사를 쳤다”며 “뒤에서 듣던 선배들이 ‘어떤 일을 하다 들어왔길래 이렇게 진짜 캐스터처럼 말하냐’고 칭찬했다”고 회상했다. “처음부터 성우 준비만 쭉 했었다면 절대로 낼 수 없었던 느낌이었죠. 다른 일들을 해봤기에 기회를 잘 살릴 수 있었어요.” 그 후 이용신 성우는「짱구는 못말려」에서 짱구 엄마가 보는 홈쇼핑의 쇼호스트 역할, 백화점이나 라디오 안내방송 역할 등 경험을 잘 살린 다양한 단역을 통해 성우로서의 경력을 다졌다.

그러던 중 입사 2년 차의 신인이었던 그는 ‘인생 캐릭터’를 만나게 된다. 이전까지 한국에서 방영되던 애니메이션에서는 연기는 성우가 하고 노래는 가수나 뮤지컬 배우가 따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달빛천사」의 신동식 PD는 가수인 주인공 역할을 더빙할 성우가 노래까지도 소화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입사할 때부터 내 노래 실력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래 오디션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 이용신 성우는 “대사 오디션을 볼 때 나름대로 기존의 성우 선배님들을 흉내 내며 힘차게 대사를 쳤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를 발탁한 신동식 PD는 힘을 빼고 원래 목소리처럼 편안하게, 꾸미지 않고 대사를 치라고 조언했다. 이용신 성우는 “루나는 아픈 아이기 때문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편안한 목소리로 연기했다”며 원작의 일본 성우도, 선배들의 목소리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간 과정을 설명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오프닝, 엔딩 곡을 포함한 총 6개의 삽입곡을 모두 녹음한 이용신 성우는 대중들에게 그의 목소리와 함께 ‘이용신’이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삽입곡은 단순히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로서 연기를 하며 노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그는 “연기로 제품을 표현해야 하는 CM송 가수로서 활동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루나에게 어울리는 풋풋한 목소리와 노련한 노래 실력으로 한 방에 이름을 알린 그는 수많은 애니메이션 OST를 도맡아 부르며 ‘노래하는 성우’가 됐다. “800여 명이 넘는 성우 중 독보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행운”이라고 자랑스레 말한 그의 눈이 빛났다.

이후에도 그는 2010년 단독 콘서트를 열며 성우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그는 “‘너무 노래를 많이 불러 와서 콘서트라도 한 번 해야 하나’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됐다”고 콘서트를 열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2013년에는 성우 최초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삽입곡만 부르다 보니 내 목소리로 녹음된 노래가 별로 없었다”고 앨범을 내기로 결심한 계기를 설명한 그는 “꾸미지 않은 ‘이용신’의 진짜 목소리로 부른 앨범이라 스스로 굉장히 만족했다”고 덧붙였다.

언제나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서

신문방송학과 학생에서 CM송 가수로, 쇼호스트에서 성우로, 또 가수로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 헤맸던 이용신 성우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성우의 세계에서도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것이 생존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캐릭터에 맞게 말투와 뉘앙스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우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관찰력을 꼽았다. 캐릭터의 성격을 가진 실제 사람이 어떤 말투를 구사하는지 관찰하고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성우라면 부지런하게 시대의 변화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에 따라 말투나 사용하는 단어의 유행이 변하죠.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서 더빙에 반영해야 해요.”

‘이용신에게 이런 목소리도 있었어?’라는 사람들의 반응에 가장 쾌감을 느낀다는 이용신 성우는 “끊임없이 내 성대를 관리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연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서 예전에는 나오지 않았던 저음도 나오게 됐다”고 뿌듯하게 밝혔다. 현재 녹음 중인 「라이온 가드」에서 주인공 ‘카이온’ 역할을 맡은 그는 드물게 소년 목소리를 내며 연기한다. “예전의 저는 소년 목소리를 잘 표현하지 못해서 공주 역할을 주로 했었어요. 요즘은 소년 역할도 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새로운 캐릭터를 더빙하는 것에 대한 갈증도 여전하다. 아직까진「달빛천사」의 루나가 그의 대표 캐릭터지만, 그는 언젠간 국산 창작 캐릭터로 인생 캐릭터를 새롭게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는 “원작이 있는 상태에서 더빙하는 것과 고유의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며 “수입 작품만 해선 실연자들의 저작권도 인정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주로 ‘예쁜 척’하는 공주 캐릭터를 맡아 왔던 그는 애니메이션 속 여성 캐릭터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 애니메이션 속 여자아이들은 문제 해결을 할 수 없고 무리의 리더가 될 수 없을까”라고 질문을 던진 그는 “진취적이고 똑똑한 여성 캐릭터를 더빙해 내 아이가 보고 자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에는 관심 없다”며 성우로서 성공한 후에도 인터넷 방송, 콘서트, 음반 등 착실하게 새로운 도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해 온 이용신 씨. “성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후로 한 번도 같은 대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매일 다른 작품, 다른 대사. 그런 점에서 저의 성격과 딱 맞죠.” 작품 속 다양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그가 또 어떤 목소리를 들려줄지 궁금해진다.

사진: 정유진 기자

tukatuka13@snu.kr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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