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역사에 불 밝혀 평화를 가르치다
어두운 역사에 불 밝혀 평화를 가르치다
  • 이지윤 기자
  • 승인 2016.10.16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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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혜경 한일민족문제학회장

여기 가려져 있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역사에 불을 비추려 십수 년을 바친 사학자가 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대일항쟁기위원회)에서 조사과장으로 오랫동안 일했고, 현재 ‘강제동원평화연구회’와 ‘한일민족문제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혜경 학회장을 『대학신문』이 만났다. 남은 일생을 강제동원 유적의 컨텐츠화에 쏟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강제동원 문제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그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봤다.

 

시대와 함께 역사학자로 성장하다

“학생기록부를 떼러 초등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장래희망이 역사학자로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지금 원했던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굉장한 자존감을 얻었어요.” 학창시절부터 역사학자를 꿈꾼 정혜경 학회장은 유신 독재가 정점에 다다른 1979년 성신여자사범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계엄령이 계속되는 암울한 시대배경과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대학시절 추억이 많이 없지만, 그는 스스로 도서관에 혼자 앉아 역사 관련 논문 읽기를 좋아하던 학생이었다고 회상했다. 졸업 후 대학원에 입학하고 싶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는 수첩 만드는 공장, 서울시사편찬위원회(현 서울역사원), 독립기념관 등을 거치며 역사학자의 꿈을 키웠다. 결국 정혜경 학회장은 서른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입학해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강제동원 문제 또한 피해갈 수 없다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박사논문을 거의 마쳐갈 때쯤 그는 새로이 강제동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이후 2001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이 일어나자 두 팔 걷고 나서게 된다. “3년간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성명서를 쓰고 휴가를 내 국회에 찾아가 의원에게 법안 발의를 부탁하기도 하고, 피해자분들이나 외교부 앞에서 연설도 했죠.” 다른 연구자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이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특별법 제정운동을 이어나가, 결국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4년 11월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위원회가 출범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

 

11년간의 대일항쟁기위원회 활동

대일항쟁기위원회는 2004년부터 2015년까지 11년 동안 34만 건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조사 자료를 전산화하고, 6,200억원의 위로금을 유족에게 지급했다. 위원회에서 조사과장을 맡았던 정혜경 학회장은 일본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강제동원과 관련한 자료를 받아오고, 피해현장을 방문해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히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할린 전체를 다 돌며 강제동원 피해자 3,000명을 만났어요. 이런 식으로 일본, 중국 등 강제동원 현장을 돌아다니며 문헌 공부, 피해자와의 대화, 현장답사를 계속했죠.”

대일항쟁기위원회 활동을 하며 정혜경 학회장은 강제동원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이유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주소를 알고도 그분들에게 먼저 연락해주지 않았다”며 강제동원 피해신청을 적극 장려하지 않거나 신청기한을 제한해 충분한 피해조사를 막은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다. 또한 해남 옥매광산 강제동원의 사례를 들며 군청이 피해 지원은커녕 추도비 건립조차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강제동원에 끌려갔다 돌아오는 배에서 목숨을 잃은 그들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도비 하나 바닷가에 세우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죠.”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야드바셈’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지금까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꾸준히 진상조사를 해, 몇십 년간 축적된 방대한 양의 자료를 기반으로 독일에게 피해배상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는 해방 이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부 차원의 충분하고 장기적인 피해조사가 이뤄지지 못했고, 군사정부 시절엔 이들을 ‘빨갱이’ 취급하며 탄압하기까지 했다. “피해자도 피해사실을 모르는데, 가해자가 먼저 나설 리가 없죠. 정확한 피해조사와 분석을 통해 일본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명확히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부족하나마 강제동원 피해조사를 위해 힘써온 대일항쟁기위원회의 활동이 2015년 12월 31일 자로 중단되고, 행정자치부 아래의 2개 과로 업무가 이관되는 일이 발생했다. 행정자치부 산하 강제동원 피해조사 인력은 10여 명으로 전문 조사인력을 포함해 100여 명이 활동하던 위원회와 비교해 그 전문성에서 논란이 일었지만 결국 해산됐다. 정혜경 학회장은 “제1공화국 시절 작성된 강제동원 피해자 28만명의 명부를 발견했음에도 이를 검증할 인력·시간·예산을 받지 못했고, 검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위원회가 문을 닫았다”며 “중요한 자료가 제대로 분석되지 못하는 점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행정자치부 담당자들이 한자와 일본어를 몰라 인수인계 받은 자료 자체를 이해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이 더욱더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정혜경 학회장은 앞으로 유적답사를 통한 현장 역사교육에 매진하고 싶다며 웃음지었다.

젊은 세대에게 역사의 길잡이 되고파

“아버지께서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이 독재에 관한 사진전을 열면 가서 보고, 방송사가 정부 비판 보도를 안 하면 항의전화를 걸기도 했죠.” 정혜경 학회장은 유신 독재 시절 10·26사태가 일어나자 집 앞마당에서 만세를 불렀다며 사회 문제에 관심 많은 아버지 아래서 성장한 시절을 회고했다. 10·26 이후 세상이 바뀔 줄 알았지만 곧바로 뒤이어 제5공화국의 등장,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이 일어나 민주주의의 성취와 좌절을 반복해서 맛본 학창 시절이었다. 그는 역사의 격변기를 겪었던 자기 세대와 달리 지금은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역사에 눈뜨기 어려운 시대라며, 그들에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안정하니까 큰 틀에서 사회를 보는 눈이 작아지는 것 같아요. 이럴 땐 기성세대나 역사학자들이 젊은 세대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죠. 역사는 현실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주니까요.”

이에 정혜경 학회장은 8년간 7,000건이 넘는 한반도 강제동원 작업장 목록을 데이터화해 현재 강제동원평화연구회와 함께 태평양전쟁 유적의 관광 컨텐츠화를 진행 중이다. 2013년 강제동원평화연구회와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공동으로 일제 강제동원 광주전남 현장답사 여행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중앙차원의 조사와 연구에만 집중하던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지방으로 연구 시각을 확대했다. “전국적으로는 8,300개, 서울에만 해도 380개의 전쟁유적이 있어요. 유적을 다양한 방식으로 컨텐츠화해서 시민들이 자기 생활 속에서 전쟁의 역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남은 인생 죽을 때까지 이것만 해야죠.” 초등학생을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담은 그림책을 준비 중이라는 그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시민들로 하여금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고 이는 자연스레 평화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밝게 웃어보였다.

 

사진: 이문영 기자 dkxman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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