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지 문화부장

고백하건대, 꽤 오랫동안 남성의 성기를 가질 수 있길 바랐다. 책 한 권이 그 발단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학급문고에 ‘빨간책’ 하나가 섞여 있었는데, 페이지를 넘기다가 남성들이 서서 소변을 볼 수 있다고 여성에게 자랑하는 장면에 꽂혔다. 당시 학교 여자 화장실엔 불편하게 쭈그려 앉아야 하는 변기만 있었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예사요 구정물은 실내화를 적시기 마련이었으며 휴지를 권하는 귀신이 쑥-올라올까봐 화장실에 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종일 참았다가 집에서 하루 묵은 체증을 해결하려 했을 정도였으니 편히 서서 소변을 볼 수 있게끔 구조화됐다는 남성의 성기가 퍽 부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수세식 변기가 보급된 후에도 썩 자주, 나는 남성의 성기를 가진 내 모습을 막연히 상상하곤 했다. 교실책상에 친구 A가 언급된 낙서 ‘A보지 따먹고 싶다’를 봤을 때, 카톡방에서 B의 몸매를 품평하고 ‘B랑 빠구리 뜨자!’고 써놓곤 남자들의 장난일 뿐이라고 화를 내는 또래를 마주했을 때, 돈 주고 ‘아다 뗐다’며 자신의 ‘첫 정액보지’가 어땠는지 늘어놓는 후배의 말을 우연찮게 들었을 때. 혹은 기이하게 신격화돼 여체에서 자궁만 떼어낸 듯한 ‘어머니의 자궁’ 이미지를 접할 때, 심지어 강간을 당해도 하나님의 아이를 낙태해선 안 된다는 설교를 들었을 때, 노총각은 국제결혼으로 여자를 사다가 애 낳으면 된다는 발언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을 때. 꺼림칙함이 찾아올 때마다 깊은 고민 없이 이렇게 상상하며 불편함을 벗어냈다. ‘내게 남성의 성기가 있었더라면?’

그러던 중 지난해 가을, 하늘이 새파랗던 저녁 5시, 영화제 봉사를 마치고 종각역 지하상가에 들렀고 한 매장에서 점원에게 난생 처음 추행을 당했다. 소프트볼팀 투수를 할 정도로 다부진 나는 ‘고작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그 작자의 성기를 차고 자리를 뜰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왔다. 실은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다. 여성들에게 흔히 가볍게 건네지곤 하는 충고를 꼬박꼬박 지켜왔기 때문이다. 줄곧 ‘남성처럼’ 행동하고자 했고 노출 심한 옷을 입지도, 으슥한 골목으로 밤늦게 다니지도 않았으므로. 그러나 백주대낮에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상가 안에서 나는 나를 끌고 가려는 그를 결코 손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쫓기듯 501번 버스에 올라탄 후 수없이 일상에서 마주했던 불편함의 원인을 되짚어봤다. 직접적으로 내가 대상화되지 않았을 뿐 ‘보지’로 혹은 ‘자궁’으로 지칭되던 수많은 여성의 이미지가 스쳐지나간 끝에 깨달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예남성’으로서의 삶이었다. ‘보지’로 대표되는 ‘창녀’의 이미지와 ‘자궁’으로 대표되는 ‘성녀’의 이미지, 어느 한쪽으로도 대상화되지 않고 ‘나’라는 개인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안이했다. ‘노오력’하면 그런 방식으로 대상화되지 않을 자격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착각했지만, 이는 내가 직접적인 추행의 대상이 되면서 부서졌다. ‘내게 남성의 성기가 있었더라면’과 같은 상상을 통해 나라는 개인이 대상화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는 것은 도피였을 뿐, 무력하게 닥쳐오는 공포에 가까운 불편함의 근원을 해소할 방법이 아니었다.

이렇게 내가 느지막하게 눈을 떴을 때쯤,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이미 소리 높여 저항하고 있었다. 그 기저엔 ‘나를 당신과 같은 한 명의 시민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상화하지 말라’는 요구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내 몸은 ‘네 멋대로’의 시선과 언사가 노니는 욕망의 대상이 아닌 온전한 내 몸이어야 한다. 나를 ‘보지’로 나를 ‘자궁’으로 보지 마라. 단지 성욕을 풀기 위해 혹은 재생산을 위해 네가 이용할 도구로써 우리를 치환해서 보지 마라.

여성들은 이제 적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되찾아가고 있다. 폴란드에선 검은 상복을 입은 여성들이 나팔관이 중지를 치켜든 자궁 그림을 피켓으로까지 제작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임신중절수술 처벌을 강화한다는 정부에 맞서 상복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내 몸 좀 내가 알아서 하게 가만 놔둬”라고 아우성치는 셈이다. 이제 나는 ‘내게 남성의 성기가 있었더라면’하고 상상하는 대신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떻게 하면 나의 몸이, 우리의 몸이 온전히 우리의 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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