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의 포럼에서 정치학과 이정복 교수는 대결의 정치가 여전히 한국정치의 중심에 있다고 진단했다. 여론을 무시하고 대통령을 탄핵했던 야당측이 국회 내 전투에서 이겼으나 국민이 심판하는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이제는 다수파가 된 여당이 과거사 청산과 국보법 폐지를 들고 나와 국회 내 전투에서 승리를 기약하고 있지만 국민들이 승패를 가리는 전쟁에서는 질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전망했다.


현재 대결의 정치는 시민사회에서도 좌우, 혹은 진보 대 보수의 이념갈등 형태로 고조되고 있다. 다양한 이해와 의사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격렬해지고 정치가 이를 평화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퇴보한다.


소모적인 갈등으로 인한 사회분열을 막는 책임이 일차적으로 대통령과 여당에 있다. 지난 총선에서 집권세력은 민주화 시기에 처음으로 여소야대를 이뤘으나 논쟁적인 정책의제를 저돌적으로 밀어부칠 만큼의 명령적 위임(man bate)을 국민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그 의석규모는 집권세력이 스스로 일구어낸 것이기보다는 선거를 압도한 탄핵쟁점과 선거제도의 마술이 빚어낸 행운이었다.

집권세력의 과반수 의석은 탄핵쟁점이 빚어낸 마술


총선 후 집권세력이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과거사 청산, 국보법 폐지,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국정의제는 그 내용이나 설정방식에 비추어 우리 사회를 치열한 갈등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십상이다. 민생과 직결된 생산성 지향의 국정과제가 부각되었어야 했다. 집권세력이 국민을 우군과 적군으로 가르는 정치투쟁에 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 민주개혁파를 자임하는 현 집권세력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과거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향수가 거세게 일 것이며 민주주의마저 지탱되기 어렵다.   


우선적인 국정의제를 설정하는 방식이 바뀌어져야 한다. 국보법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 법의 존폐가 문명국가 여부를 가늠하는 것이라면, 정도를 밟는 문제 제기가 요구된다.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해서 법을 만드는 의원들에게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아울러 대국민 담화 등 좀더 정통적인 방식을 통해 국민을 안심시키고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텔레비전 방송사와의 대담에서 대통령이 속내를 불쑥 내미는 식의 의제 설정은 대의 민주주의는 물론 참여민주주의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도덕적 명분따라 대결구도 만들기보다 실용적 신중함 갖춰야


국정의제는 도덕적 명분에 치우쳐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명분에만 집착하면 반대세력과 타협할 여지가 없어진다. 도덕적 명분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하다가 자신의 위선과 가장된 우월성이 드러나게 될 경우 상대로부터의 치명적인 비판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집권세력 내부에서 합리적인 토론이 선행되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다수파로서의 자제력과 신중함이 요구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여당의 당론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는 형국이라면 그동안의 정당개혁은 무위로  되고 제왕적 정치 스타일이 복원된다. 이런 다수파가 그 의사를 신속하게 관철하려고 강행할 때에 소수파와의 극한 대치는 불보듯 뻔하다.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할 이 시기에 대결의 정치가 한국의 고질적인 불임(不稔) 정치를 심화시키고 있다.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생산적 정치의 도래를 고대한다.

▲ © 대학신문 사진부

박찬욱

사회대 교수ㆍ정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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