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년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다. 그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근대문학을 확립한 작가이자 일본인들의 국민적 자부심을 드높인 존재다. 한때 1,000엔권 지폐의 얼굴이었을 만큼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일본의 존경심은 지대하다. 윤상인 교수(아시아언어문명학부)는 “나쓰메 소세키는 한 마디로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영웅”이라며 “그의 텍스트가 일본 국민의 의식을 만들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평했다. 일본에서 그의 작품에 담긴 정신은 가장 존중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여지며,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여러 편을 일본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6년은 그의 사망 100주기를 맞이하는 해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100주기를 맞아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출간되는 등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도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의미를 가질까? 그의 근대에 대한 인식과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를 비판하며 펜을 들다

 

“그러나 이제부터 일본도 점점 발전하겠지요.”라고 변호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태연하게, “망하고 말 거요”라고 말했다.

-『산시로』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33살의 나이로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영문학도로서 설렐 법한 일이지만 정작 그는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최재철 교수(한국외대 일본언어문화학부)는 “소세키가 자신을 와이셔츠에 묻은 먹물 같은 존재 또는 이리떼 사이의 황견 같은 존재로 비유했다”며 그가 영국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말했다. 국비 유학생이었음에도 지원되는 생활비의 액수가 턱없이 모자랐던 등 유학 생활 자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귀국 직전에는 일본 내에서 소세키가 유학을 가더니 미쳤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신경 쇠약이 심해졌다.

이토록 힘겨운 유학 생활이었지만, 윤상인 교수는 “소세키를 작가로 만든 것은 영국 유학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런던에서 소세키가 자기의 패배감을 대결 의식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찾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런던은 산업혁명을 완수하고 서구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영국의 수도이자 근대 문명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도시였지만, 동시에 곳곳을 뒤덮은 매연과 빈민 노동자들의 더러운 슬럼가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었다. 송태욱 번역가는 이를 두고 “영국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식 근대화의 이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적인 것만을 좇는 일본의 모습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세키는 실제로 그의 작품 곳곳에 서구 열강을 모델로 하는 일본의 근대화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의 전반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산시로』(1908)와 『그 후』(1909) 등의 작품에서 이런 비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산시로』의 히로타 선생이 일본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러일전쟁에 승리했다는 사실과 후지산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하는 대목에서나, 『그 후』의 다이스케가 서양식의 근대화를 꿈꾸는 일본 사회에서는 취직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등에서 소세키가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최재철 교수는 “일본의 개화는 서구의 차관에 의존하는 외발적인 개화였다”며 “300여 년에 걸친 서양의 근대화를 30년 만에 달성하려는 일본의 모습을 소세키는 수박 겉핥기식 개화라 비판했다”고 말했다. 윤상인 교수 역시 서양을 따라가는 일본이 아닌 새로운 근대사회로서의 일본을 개척해야 한다는 소세키의 생각을 높이 샀다. 그는 “소세키는 서양도 복수의 문명 중 하나의 문명이라 인식했다”며 “서양이 기준이면 일본도 기준이고 서양적 표준이 있다면 일본적 표준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양 대 일본의 관계에서 서양을 추종하는 근대화가 가진 맹점을 파악하고 일본만의 주체적인 근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점에서 소세키의 앞선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에서

 

소세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또 다른 주요한 계기로는 러일전쟁을 들 수 있다. 최 교수는 “소세키 역시 메이지 시대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신이 났을 것”이라며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에 대한 민족적 자신감의 한 발로로 소세키가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세키가 제국대학의 문학 박사 학위를 거부했다”면서 “소세키가 교수가 되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창작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 교수도 “러일전쟁을 계기로 나쓰메 소세키가 비로소 일본인 스스로의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게 됐다”고 말했다.

이를 잘 담은 작품이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다. 단편 「도련님」(1906)과 함께 소세키의 대표적인 초기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고양이를 관찰자로 내세워 일본 사회를 풍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최 교수는 “관찰자가 고양이다 보니 사회를 비판하는 데 더 자유로웠다”고 말하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당대 지식인 계층의 위선과 일본 근대화의 부작용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윤 교수는 이 작품이 서양의 근대문학과는 다른 일본만의 근대문학을 확립했다는 데 주목한다. 그는 “소세키는 러일전쟁을 겪으며 일본인이 일본어로 일본의 감정과 사상을 담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곳곳에서 일본의 토속적인 문체가 활용된다거나 일본 특유의 문화적 색채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양이가 주인의 집안을 살피고 동네 곳곳을 누비는 사이에서 일본식 식문화와 가족문화, 당대 일본인의 사고방식 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살피기, 문학적 성취와 한계 사이

 

자연의 아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지 다이스케는 헤맸다.

- 『그 후』 중에서

 

소세키 문학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이기적인 본성을 소설화하며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을 잘 풀어낸다는 점도 소세키의 작품이 근대적인 소설로 평가받는 이유다. 송태욱 번역가는 소세키의 문학이 기본적으로 작가 자신을 치유하는 성격의 문학이었기 때문에 심리 묘사가 탁월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세키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려 했던 것 같다”며 “소세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소세키가 투영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소세키는 신경 쇠약에 자주 시달렸으며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일도 잦았다. 송 번역가는 “발작이 가장 심했던 때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기 직전”이라며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세키의 작품은 단순하고 통속적인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다. 『산시로』에서부터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주로 남녀의 애정관계를 삼각관계로 풀어낸다. 『그 후』에서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다이스케의 이야기와 『마음』에서 친구 K가 연심을 품은 상대를 남몰래 같이 흠모하는 선생의 모습은 애정 관계만의 측면에서는 이야기상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 사이에서 비도덕적인 사랑을 두고 갈등하는 개인의 심리를 세밀히 다루고, 결국에는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자세히 그려낸다. 송 번역가는 이를 두고 “단순한 사건의 사이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력이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에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돼 천황에서 끝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 중에서

 

『마음』과 『명암』 등 그의 후기작에서 인간의 내면과 정신을 그리는 경향은 더욱 짙어진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소세키의 기법이 더욱 유려해졌다고 평가하지만, 일본 사회에 대한 특유의 비판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소세키가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 같은 변화는 그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초청으로 1909년 만주, 조선 기행을 다녀온 이후 일어났다. 그는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자부심을 느꼈다거나 조선인이나 만주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태어난 게 다행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1910)을 기점으로 그의 작품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윤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에게는 구체적인 정치 인식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서양 대 일본의 양자적 세계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진보적인 생각이었지만, 그가 서양과 일본을 넘어선 다자적인 세계를 그리지 못한 것 역시도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마음』의 인물들은 모두 메이지 정신에 침잠한 인물들이다. 인물의 죽음이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많이 등장하며, 자살이 많이 다뤄진다. 그리고 자살의 주요한 동인으로 메이지 천황의 죽음을 그린다. 최 교수는 『마음』에 대해 “메이지 시대가 좋았다고 보는 입장이 숨어 있다”며 “유교적 개념 속에서 가족이나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시대정신이 그리워졌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 역시 “사무라이 무사도의 정신주의가 『마음』을 꿰뚫는 말이라 생각한다”며 “근대적 소설에서는 이미 폐기처분됐어야 할 유교적 덕목을 다시 소설 속에 구현했다”고 말했다.

천황제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국가 운영 체제는 필연적으로 봉건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이 지점에서 『마음』이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주요한 텍스트로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인간의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인간 정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 역시 수작이지만 시대와 사회를 향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소설을 소세키 작품의 정전이라 평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윤 교수는 “가장 낡은 가치관을 담고 있는 작품이 그의 정전으로 평가받는 게 안타깝다”며 “메이지 시대를 긍정한다는 정신주의적 작품인 『마음』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수가 도쿄를 유학하던 중에 쓴 일기에서 그가 소세키의 『산시로』를 읽었다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평론 「문학이란 하오」에서도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적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이광수, 염상섭 등 1910년대, 20년대 한국문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산시로』의 산시로가 도쿄로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변화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을,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조선의 현실을 묘지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비교해보는 등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최 교수도 우리와의 연관성이 깊다는 데서 소세키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문학과의 비교의 관점에서도 소세키를 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세키 작품의 한계로 흔히 언급되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부재를 고려한 독서 역시 필요하다. 일본에서 소세키의 작품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 왜 『마음』이 소세키의 대표작이 됐는지 등을 되짚어봄으로써 그 독법의 뒤에 잠재된 무의식적인 욕망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문화적인 불평등 관계라는 구도에서 소세키 문학이 항상 그 중심에 있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윤 교수의 말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독해돼온 방식을 염두에 둔 메타적인 해석 또한 현재적인 의미를 가지는 문제다.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