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르포] 문화가 스며있는 그 상가에 가다 - ③ 동대문 종합시장

진동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콘솔게임부터 목소리에 화음을 더해주는 기타,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한 벌의 옷까지. 많은 것들이 데이터화 돼 무형으로 떠도는 이 시대에도 문화를 향유하려면 사물화된 하드웨어가 필요하고, 그 바탕엔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형성된 문화 관련 상업밀집지역, 즉 상가들이 있다. 콘솔 게임 ‘덕후’들의 보물창고 국제전자센터, 음악인의 젖줄 낙원상가, 그리고 패션계 터줏대감 동대문 패션상가까지. 이번 연재 기획에선 추억을 간직한 상가들을 찾아가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을 그려내고자 한다.

 

① 국제전자센터 ② 낙원상가 ③ 동대문 종합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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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역에서 내리면 역사를 채 빠져나오기 전부터 짐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잰 발걸음을 놀리며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파를 따라 9번 출구에 당도하면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의류종합상가 ‘동대문종합시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찬바람을 등지고 건물의 문을 열면 1층을 빽빽이 채운 액세서리와 의류 부자재 점포들이 보이고, 계단을 올라가면 원단 점포들이 펼쳐진다.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따뜻하게 데워진 이곳은 패션 산업을 이루는 가지각색 재료를 만나볼 수 있는 동대문종합시장이다.

원단 상가의 풍경. 알록달록한 원단 샘플들이 가게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근현대사를 품고 자라온 동대문종합시장

동대문이 ‘패션의 메카’가 된 것은 2000년대 초 대형 쇼핑몰들이 들어선 이후지만 동대문에 상권이 형성된 지는 100년이 훌쩍 넘었다. 1905년 일제의 수탈에 맞서 민족 자본을 융성시켜보자는 취지로 장사꾼들은 종로 일대에 최초의 근대식 시장인 ‘광장시장’을 일궈냈다. 광장시장에서 시작된 동대문 일대의 상권이 본격적으로 의류 전문 상권으로 거듭난 것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미군의 옷을 염색해 재판매하면서 청계천을 따라 생겨난 평화시장부터다. 이렇게 형성된 평화시장, 동화시장 등을 바탕으로 시작된 동대문의 의류 상권은 1970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종합상가인 동대문종합시장의 모태가 됐다.

처음 동대문종합시장이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곳에선 주로 양복지, 한복옷감, 침구류 등 혼수에 필요한 원단을 주로 취급했다. 40년 동안 이곳에서 근무한 동대문종합시장 D동 관리운영위원회 김천배 과장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혼수로 양복지와 한복옷감을 골라 동네 양장점, 한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기성복이 보편화되자 시장 안의 점포들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김 과장은 “수많은 양복지 점포들이 문을 닫았고 한복 점포도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상가의 풍경도 변화했다. 원단들을 커다란 두루마리로 말아 가게 한가득 쌓아놓고 판매하던 예전과 달리, 새롭게 들어선 점포들은 원단 샘플만 매대 위에 진열해 손님이 편하게 골라볼 수 있게 하고 남은 공간을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몄다.

10여 년 전 청계천이 복원되고 때마침 불어온 DIY 열풍은 의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동대문종합시장으로 이끌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액세서리 혹은 의류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도록 상가 1층과 4, 5층엔 비즈, 지퍼, 끈, 단추 등 의류 및 액세서리 부자재를 소매로 판매하는 점포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3년 전 부자재 점포를 열었다는 A씨는 “남편이 액세서리 공장을 운영하는데, DIY 액세서리를 만들고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가게를 차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 벌의 옷이 만들어지기까지

부자재 상가에 위치한 한 점포의 모습. 한 상인이 뱃지를 손수 만들고 있다.

이런 변화들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동대문종합시장은 명실상부 ‘종합의류상가’로 거듭났다. 현재 이곳에선 한 벌의 옷이 만들어지기 위한 모든 과정을 해결할 수 있다. 만들고 싶은 옷의 디자인에 알맞은 원단은 각 동의 2층과 4층 사이의 원단 점포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원단을 구입했다면 1층과 5층에서 옷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레이스, 단추, 지퍼를 고를 차례다. 또 1층과 5층에서 구입한 각종 비즈들로 패션의 화룡점정인 액세서리를 직접 만들면 이로써 한 벌의 옷이 완성된다. 만약 재봉틀을 다룰 수 없다면 D동 2층 혹은 지하 1층에 위치한 수선집을 찾아가면 된다.

덕분에 시장은 원단 도매업자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의류 업체 종사자들로 하루 종일 북적인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한 손에는 수첩이나 파일을 들고 나머지 손에는 짐 보따리 혹은 통화 중인 휴대폰을 들고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의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박찬이 씨는 “원단부터 액세서리까지 모든 재료를 한 번에 볼 수 있어서 이곳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디자인 도안이 그려진 파일을 들고 다니던 그는 “요즘엔 벨벳 원단이 유행하는데, 되도록 유행에 편승하지 않는 독특한 원단을 찾으려고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친구를 도와 액세서리 쇼핑몰에서 일한다는 이지희 씨도 “거의 모든 재료가 이곳에 모여들기 때문에 동대문은 디자이너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설명했다.

어떤 업종보다도 유행에 민감한 의류업계 사람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동대문종합시장도 유행이나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의류 제작 회사에서 원단 구매를 담당하는 박정임 씨는 “유행에 따라 시장에서 구매하는 원단이 다르다”며 “의류업은 한발 앞서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내년 봄, 여름 원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발맞춰 매대 위의 샘플들에는 각 시즌별 유행 색깔과 패턴을 갖춘 원단들이 눈에 띄게 진열돼 있다. 실제로 레이스 전문점 ‘부영레이스’ 직원 B씨는 “원래 레이스는 얇아서 봄, 여름에 주로 나가는데 최근 겨울에도 레이스 수요가 늘어나 두꺼운 천과 레이스를 합포한 원단을 새로 들여왔다”고 설명했다.

 

패션을 꿈꾸는 이들의 첫 관문

동대문종합시장은 꿈꾸는 청년들의 배움터가 되기도 한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표정으로 정신없이 일하는 의류업계 종사자들이지만 ‘프로’들 사이에서 샘플을 유심히 살피는 미래의 디자이너의 앳된 얼굴도 종종 눈에 띈다. 이들은 패션디자인 혹은 의류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로 주로 졸업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의류학과 패션쇼를 준비하기 위해 동대문종합시장을 방문했다는 강소정 씨는 “상인들은 주로 도매업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소매로 구매하는 학생들에게는 아예 팔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실전’에 투입돼 겪었던 서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몇 번 방문하면 노하우가 생긴다. 송경희 씨는 “같이 준비하는 친구들끼리 회사 이름을 지어냈었다”며 “가명을 대며 회사에서 쓸 샘플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판매하더라”고 편법을 살짝 공개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게를 내기 위해 40년 전 이곳에 입성한 터줏대감부터 종종거리며 점포를 기웃거리는 패션 새내기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쉴 새 없이 붐비는 동대문종합시장은 옷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꾸린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40년 넘는 세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변모하는 이곳이 보여줄 미래의 유행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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