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으로 승부하는 정치인, 양당 정치에 반기를 들다
정책으로 승부하는 정치인, 양당 정치에 반기를 들다
  • 정채현 기자
  • 승인 2016.11.1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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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관악갑 국회의원 김성식
김성식 의원은 본인의 정체성을 합리적 개혁주의자로 규정한다. "저는 신자유주의자도, 시장주의자도 아닙니다. 시장의 실패를 국가가 보정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경제를 꿈꿉니다."

양당 체제의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고 소신 있는 행보를 이어 온 정치인이 있다. 그는 ‘여당 속의 야당’이라 불리며 개인의 소신 대신 계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끊임없이 쇄신을 요구했다. 그러다 결국 두터운 지지층을 가진 한나라당을 나와 야인으로 살다가, 현재는 ‘양당정치 타파’를 외치며 제3당인 국민의당에서 정책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민생정책 공장장’ ‘경제통’이라는 다양한 별명을 가진 서울 관악갑의 지역 김성식 국회의원을 『대학신문』이 만났다.

 

민주화 부르짖던 대학생, 정치인이 되다

김성식 의원은 유신독재가 정점에 이른 1977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가 본 캠퍼스는 전투 경찰이 교내에 상주해 있고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가시 장미가 심어져 있는 등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을 짓누르는 곳이었다. 이런 억압적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앞장서게 됐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78년엔 긴급조치 철폐 시위를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유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경제학자가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의 미래는 민주화 운동 때문에 점차 변하게 됐다. “시위하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수배, 정학 등의 고난을 거치며 경제학자의 꿈은 지워졌죠.”

그는 졸업 후 첫 직장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 화학 노동 연합에 들어갔다. 노조운동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1980년대에 임금 인상, 단체협약 등의 자료를 만들어 보급하며 노동자 인권을 위해 힘썼다. 노동자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비밀리에 전두환 정권 타도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런 그에게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살기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민주화 운동의 연장이었다. “제가 본 민주화 운동엔 공정, 정의, 경제적 활력 등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민중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재야 민주화 세력이 합법적 정당을 통해 그 꿈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죠.”

 

소신, 탈당, 3당체제 성공적?

민주화 운동을 하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띠게 된 김 의원은 1996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제정구 의원이 있던 통합민주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민주화의 흐름에도 당시의 정당은 민주적이지 못했습니다. 통합민주당에 입당해 정치판에 만연한 지역주의와 1인 중심의 보스 정치에서 벗어나고자 했죠.” 하지만 통합민주당은 15대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해 다수의 정치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는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신한국당은 15대 대선을 앞두고 기존에 영향력이 컸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자 통합민주당 잔류파와 합당했다. 이에 부패한 구정치 청산을 목표로 내걸고 한나라당이 만들어졌다. “평소 존경했던 제정구, 이부영 선배와 함께 3김정치로 대표되는 보스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합류했습니다.”

김 의원은 10년 넘게 한나라당에서 재정 경제, 예산 결산, 정무를 관장하는 제2정책조정위원장,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의 업무를 맡으면서도 소신 있는 행보를 이어나갔다. 진영논리에 따라 입장이 표변하고 대통령의 국정을 뒷받침해주는 데 안주하는 ‘낡은 보수’에 대항해 개혁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던 것이다. 무궁화 배지를 처음 달고 18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당내 소장파 초선의원들과 함께 ‘민본21’이라는 모임을 꾸려 당대표의 독단적인 당 운영을 바로잡기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당내 계파 갈등 해소를 위한 계파 청산 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2011년 한나라당 소속 의원의 비서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후보 홈페이지에 디도스 공격을 가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12월 김 의원은 한나라당에선 더 이상 전면적 수준의 쇄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탈당했다. “정치 의병을 자처하며 죽을 각오로 당을 나왔습니다. 소신 없이 청와대가 시키는 일을 따라하고 계파의 붕당적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는 지양해야 합니다.”

김 의원은 한나라당 탈당 이후 무소속으로 2012년 19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를 양당 체제에서 찾는 그는 안철수 의원의 신당 창당에 힘을 보탰지만, 2014년 안 대표가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자 그와 결별했다. 그러다 2016년 중도개혁을 표방한 국민의당이 새롭게 창당돼 합류했고 현재는 국민의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양당의 정치 독점은 정당 정치인들이 공천권자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들이 오로지 국민의 눈치만 보게 하기 위해서는 양당체제의 구조적인 개편이 필요합니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약 27%의 득표율로 정당 득표 2위를 차지해 크게 선전했지만 여러 정당에서 탈당한 인사들이 모여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하지만 김 의원은 국민의당이 뚜렷한 개혁 노선을 부각시키지 못한 미완성 상태지만 3당 체제를 정립하며 양당체제를 타파할 디딤돌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총선에서 얻은 지지는 국민들이 거대양당의 대립에 완충 역할을 하는 새 정당의 필요성에 공감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관악구의 우직한 일꾼

관악구와의 인연 또한 김 의원의 정치인생에서 빠트릴 수 없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관악갑 후보로 출마한 이래 5번 연속으로 이 지역에서만 출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나왔으니 관악구에서 출마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첫 발을 내디뎠다는 그는 처음부터 관악구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 번 낙선하고 세 번째에 처음 당선된 관악구는 대학생이 많이 거주해 젊은 열기가 높은 미래지향적인 곳입니다. 당선 이후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곳에서 정치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점차 하게 됐지요.” 2008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당시 관악의 자원봉사자들과 며칠간 함께 봉사를 했던 경험도 그에게 있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관악구에서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구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다. 예컨대 낙성대 영어마을은 그의 대표적인 성과다. 당선 전부터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을 찾아가 관악구 부지의 경쟁력을 꾸준히 호소해 2010년 낙성대 영어마을이 개관하는 데 힘썼다. 현재 낙성대 영어마을은 방과 후, 주말, 유치부, 도서관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특히 사회적 배려계층 학생에게는 참가비를 전액 지원해 소득에 따른 교육 격차 완화와 사교육비 절감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그는 관악구 의원으로서 했던 가장 뿌듯한 활동으로 구암고 설립을 꼽는다. 관악구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대규모 재개발로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데 비해 학교 수는 부족했다. “특히 봉천동 북부에 고등학교가 부족해 아이들이 통학하기 힘들었어요. 많은 4·50대 주민들이 자녀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즈음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갈 만큼 고등학교 신설은 관악구에 절실했습니다.” 김 의원은 구민과 약속한 기간 안에 개교하기 위해 설계 업체를 직접 찾아다니며 힘쓴 결과 2012년 구암고가 만들어졌다.

 

정책 디자이너로 한 걸음 더

김 의원은 국회 정책 활동에 있어서도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정치부 기자들이 투표로 뽑는 백봉신사상 베스트 10에 4년 내내 이름을 올렸으며 시민단체 ‘법률소비자연맹’이 뽑은 18대 국회 의정평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식어를 얻게 된 배경은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성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노총에서 일한 이력을 바탕으로 민생에 밀착한 다양한 경제 정책을 발의해 ‘경제통’이라고 불리는 김 의원은 그동안 영세 자영업자의 조세 감면과 청년 전용 창업자금 신설 등을 위해 힘썼다.

그는 한국 경제가 구조적 위기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수명이 다한 기업을 단호히 정리하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눈앞의 성장률에만 급급한 정부가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구조개혁 대신 부채 의존형, 부동산 의존형의 단기적 경기 부양책만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구조조정에 앞서 안정적 개혁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안전망의 강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조개혁으로 피해를 입는 노동자와 소외계층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120만원의 실업급여로는 해고되면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조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죠.”

게임 산업 또한 그가 유달리 관심을 쏟는 분야다. 그는 2011년 게임산업 육성을 위한 심의제도 개선 방안을 발의했다. “게임을 잘 하진 못하지만 여론 파악을 위해 게임 커뮤니티를 자주 봅니다.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임은 영화보다도 큰 부가가치 창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에 셧다운제가 포함됐을 때 이를 야간 통행금지법에 비유하며 게임중독 예방에 셧다운제의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공중파 생방송 토론에서 게임 커뮤니티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등 ‘겜덕’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네티즌들에게 대표적인 ‘친게임파’ 정치인으로 통하고 있다.

김성식 의원의 입법 활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대 국회에서 저출산·고령화 대책 특별위원회에 소속돼있는 그의 최근 관심사는 저출산 문제다. 현재 그는 총 5일에 불과했던 배우자의 출산 휴가를 6개월간 30일 한도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정책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는 김성식 의원. 좋은 정책으로 국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21세기 정책 디자이너’다. 18대 국회의원으로 일한 4년간 1,200쪽에 달하는 정책 연구 보고서를 발간할 만큼 무서운 속도로 입법연구를 지속해온 그가 앞으로 어떤 정책으로 국민 앞에 설지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

 

사진: 이문영 기자  dkxman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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