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제 버릇 누구 못준다고, 늘 원고 마감 기한을 넘기고야 마는 이 고약한 버릇 때문에, 지금 나는 학회 참석차 지방에 가는 기차 속에서 끙끙대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핑계도 없다. 누구는 바쁘지 않아서 기한 안에 원고를 넘기랴?

이번 호 『대학신문』을 받아 호기 있게 펼쳐보니, 가운데 면이 열리면서 사진 몇 쌍이 눈에 들어왔다.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그때와 지금’이라는 사진기획이다. 20년 전의 사진과 오늘의 사진을 묶어 놓았는데, 그 20년이라는 세월을 짧은 것으로 보기엔 아직 내 나이가 적지만, 그렇다고 그때 내가 그다지 젊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엄청나게 보일 그 두 시대의 차이가 내게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다만 먼저 우리 학생들 표정에서 보이는 특유의 열정과 진지함이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서 독자가 비교하기 쉽게 옛 사진에 새 사진의 구도를 맞추려 애쓴 기자의 세심한 배려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눈길을 신문의 첫 면으로 돌리니, 이번에는 20년이 아니라 우리 서울대처럼 최소한 70년은 묵어 보이는 유령, 내가 학생 시절에 자주 봤던 그 유령이 아직도 배회하는 것 같다. ‘빼앗긴 민주주의, 거리에 나선 학생들’ ‘시국선언’ 그리고 ‘검열’까지, 8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기사 제목들이 2016년의 『대학신문』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들에서 느낀 익숙함이 서울대의 일원이라는 정체성과 거기서 오는 평온함을 준다면, 이 익숙한 제목들이 증명하는 역사의 어이없는 반복에서 오는 느낌은 그저 ‘자괴감’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내 이럴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이 대명천지에, 21세기의 우리 민주공화국에서, 아무런 자격도 보잘 것도 없는 몇몇 개인 때문에 나라의 행정 체계가 유린되고 사회 전체에 크고 작은 온갖 비리가 말기 환자의 암세포처럼 퍼져가고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소문이 악취처럼 떠다닐 줄은….

개인에게처럼 나라에게도 못된 버릇이 있는 것일까? 하기야 국가에도 이성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쁜 버릇이라고 왜 없으랴? 오늘의 끔찍한 현상들이 국가의 버릇에서 나온다면, 정말 이 버릇은 개나, 아니 악마에게나 주고 싶다.

신문의 사명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전달은 동시대인을 위한 것이기도, 후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정확한 정보들이 기록으로 축적되고 전승될 때, 우리는 비로소 바른 역사를 가지게 된다. 지금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이 사태의 배경에는 바로 기록의 잘못된 유출, 잘못된 사람에게의 유출이 있지 않은가? 개인에게 기억은 나쁜 버릇을 상기시켜 부끄러움과 후회를 준다. 역사, 즉 집단의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른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집단의 좋은 버릇, 나쁜 버릇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나 아는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에 덧붙여 구체적인 제언을 하나 하고 싶다. 가끔 이처럼 비슷한 과거의 사건이 되풀이 될 때마다『대학신문』의 옛날 기사들을 한 번쯤 새로 끄집어내어 실어주면 어떨까? 우리가 가진 온갖 좋고 나쁜 버릇을 깨닫게 말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선 안 된다. 정말 안 된다.

 

이영목 교수

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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