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동환 기자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이후 박정희는 반공ㆍ냉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서적을 제외한 모든 책의 출판을 탄압했다. 출판 전에 검열을 실시한 ‘제3공화국’은 금서가 하나도 없는 ‘원천적 금서시대’였다. 그러나 유신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의식 있는 지식인들의 저술활동이 활발해지자, 유신정권은 1974년 ‘긴급조치’를 내려 국내 여론을 통제했다. 이때부터 많은 책이 금서처분을 받게 된다.

 

1970년 5월 시집 『오적』이 반체제 도서라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저자인 김지하는 반공법(현 국가보안법의 전신) 위반으로 체포되고, 「오적」이 실렸던 좬사상계』는 폐간됐다. 김지하는 「오적」이라는 시를 통해 일제강점기 수혜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국회의원(국獪의猿), 고급공무원(고급功無猿)등 신조어 한자로 표현하면서 ‘오적’이라 일컫는다. 다섯 도둑들이 ‘남녘 똥덩어리 둥둥…구정물 한강가’에서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 쌌는다’며 도둑질 대회를 벌이는 것을 묘사해 이들의 부정부패와 방탕한 생활을 비판ㆍ풍자했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1974, 창작과비평사)는 1974년 국가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이 책은 당시 ‘중국 공산당’이라는 피상적 개념만 가졌던 민중에게 중국현대사를 자세히 알렸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으로만 알려졌던 ‘베트남 전쟁’이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렸다. 이는 당시 반공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온 민중의 국제정치 현실에 대한 시각을 전환시키는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으며 1974년 긴급조치 9호부터 전두환 정권 말기까지 이 책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됐다.

 

또 1978년 9월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 삼촌」이 큰 주목을 받았으나 불온소설로 지정됐다. ‘순이 삼촌’은 1949년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으나 경찰 기피증과 환청증세에 시달리다 결국 꿩 약(일명 사이나)을 먹고 자살한다. 「순이 삼촌」을 통해 4ㆍ3사건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고발한 현기영은 국가안보를 위협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1979년에는 분단 이후 정치와 경제, 사회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다룬 인문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1979, 해전사)은 ‘반체제ㆍ반정부 사회 비판서’라는 이유로 불온도서가 됐다. 프레이리의 『페다고지』(1979. 한국천주교평신도회사도직협의회)는 민중에게 교육의 목표가 ‘인간해방’이며 정치 교육을 통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또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1979, 한마당)는 시골 소년이 소년하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겪는 일을 서술해 제도권 교육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앞의 두 서적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유해도서’로 구분됐는데, 이에 대해 학민사 김학민 대표는 “교육학 책이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된 것은 유신정권이 책의 의미를 확대ㆍ왜곡해 금서로 지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당시 금서정책에 대해 『금서: 금서의 사상사』의 저자 김삼웅씨는 “정해진 원칙 없이 무차별적으로 출판을 탄압했다”며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책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의식을 고양하거나 민중의 삶을 주제로 한 책까지도 금서가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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