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 부편집장

첫 번째,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질문의 작품들로 이름을 날린, 모두가 아는 데미안 허스트가 있다. 상어나 양, 소를 반절로 가르거나 화살을 잔뜩 꽂아 포름알데히드 수조에 넣어놓는다든가, 혹은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니다 죽게 만드는 방을 만든다든가. 두 번째, 유명 스트리트 의류 브랜드 오베이(OBEY)의 그래픽디자이너 셰퍼드 페어리가 이름을 알리게 된 버락 오바마의 ‘희망’ 포스터. 오바마의 얼굴과 ‘hope’ 글자의 스텐실 포스터는 오바마의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 번째, 자신의 생각을 독특하고 하드코어한 주인공 조미지에게 투영해 적나라하게 드러낸 ‘미지의 세계’ 등의 만화로 두터운 매니아층이 있었던 이자혜의 만화.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예술 작품들에는 결여돼 있는 것이 있다. ‘양심’이 바로 그것인데, 첫째로 데미안 허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수많은 동물을 죽였다. 두 번째, 셰퍼드 페어리는 AP통신 기자의 사진을 그대로 트레이싱(원본을 뒤에 대고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해 수십만 달러의 수익을 챙겼다. 세 번째의 만화가는 성폭행을 모의했고 그 상황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렸으며 피해자의 이름을 등장인물에 따오는 등의 행동으로 2차 가해를 계속해서 재생산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예술에 있어서 윤리 혹은 제작자의 양심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결심하게 만든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올해 초, 과 동기의 작품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발견됐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타대생이 수업의 과제물로 제출할 영상작업의 제작을 위해 지난 한 해를 바친 친구의 작품을 몽땅 박살낸 것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 친구가 우연히 보러간 전시에서 상영된 어느 영상 속에 나오는 조각상이 지난해 같이 밤을 지새우던 친구가 만든 조각상이었던 것. 영상 속 조각상의 모습은 참담했다. 주황색 물감에 뒤덮였고 파란색 물감으로 눈물까지 흘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조각상을 만든 친구는 본래 작품이 보관돼 있던 곳을 찾았으나 작품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늘 뭔가를 만들어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작업을 하자’였다. 이 ‘부끄럽지 않은’에는 봐줄만한 퀄리티의 작업을 하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솔직하고 당당한 작업을 하고자 하는 나의 다짐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무언가는 늘 나를 닮아있다. 크게는 나의 가치관부터 작게는 좋아하는 색이나 섬세하지 못한 성격까지 투영하고 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자신의 자식과 같은 생산물이 다른 생명을 죽여서 만들어냈거나, 누군가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다거나, 소중한 저작물을 베끼거나 훼손해서 만들어졌다면 그 작품 앞에 스스로 당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 당당한 사람들은 있고 자신이 한다는 ‘예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자신의 예술을 위해 희생되는 것의 가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태는 어디선가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때로는 사회적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혹은 금기시되는 행동들을 예술이 가능케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저 먼 ‘예술’ 속 세상이 아니라 현실로 넘어오는 순간, 사회적인 문제와 직면한다. 예술에 의해 재산이나 생명, 인권이나 누군가의 가치관까지 공격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사람 사는 사회 속에서 ‘예술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술은 이미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있고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예술작품을 수용하고 있다. 이렇듯 예술가라면, 적어도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잠시 신경 쓰지 못했던 마음 한구석 양심을 들춰 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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