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의혹만 무성했던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주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국정감사 질의에서 도종환 의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한국일보」도 지난달 12일 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을 입수해 보도한 바 있다. 지난해 5월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세월호 시국선언 △문재인·박원순 후보 지지선언 등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총 9,47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연극부터 미술, 무용, 국악, 문예까지 문화예술계 전 범위에 걸친 이 리스트는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 진흥 실무기관들로 전달됐고, 이에 해당자를 지원 심사에서 배제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준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심지어 이 리스트가 2014년 여름부터 2015년 1월까지 정무수석실에서 작성됐다고 알려졌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 문체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할 당시 이 리스트가 만들어졌다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정부가 예술가의 정치적 입장을 문제 삼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실무 기관에 하달했다는 의혹을 사는 것 자체가 문제다. 사실 국내 문화예술계는 아직 두터운 국내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아 공공지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금 배제는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느냐와 직결된 문제다. 예술가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문화예술 지원 사업이 결정된다면, 정부는 정치적으로 ‘불온한’ 예술가들을 낙인찍고 이들을 공공 지원으로부터 원천봉쇄해 사실상 이들의 예술 활동을 고사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문화예술 진흥을 담당해야 하는 실무기구들이 정치성을 기준으로 다양성과 실험성을 지닌 작품들을 고사시킨다면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이 문화생태계에 남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소위 ‘블랙리스트’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현 정부의 문화예술 진흥 시스템에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반증한다. 현재 국내 공공 문화예술 지원 사업은 문체부 주도로 이뤄지며 그 산하기관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은 문체부와 수직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를 취한다. 심지어 산하기관 대표들을 모두 문체부가 임명하기 때문에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된 집단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상부에서 내려온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상부 지시로 인해 심사결과를 바꿔야 하는데 조작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관계자의 증언 보도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대변한다. 문화예술 지원 시스템의 행정적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시급하다. 영국의 경우처럼 예술위원회는 행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만 집행 내용을 보고하는 정도의 감독만 받으며 예술지원업무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계 공공 지원은 한 국가의 문화적 생태계를 조성하는 중요한 사업으로 단순히 시혜적인 후원 사업만이 아니다. 만일 수많은 예술인을 대상으로 검열의 가위가 작동한다면 한국 문화예술 생태계의 다양성은 보장될 수 없으며, 한국 예술계의 미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예술계 검열 사태의 책임자가 있다면 이를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 나아가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협하는 현재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 시스템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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