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강애란 개인전 - ‘자기만의 방’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저서 『자기만의 방』(1929)에서 여성이 고정적인 500파운드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남성 못지않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실제로 개인의 방은 가장 편안한 공간이자 자신의 자유로운 모습을 표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박탈당해왔던 여성만의 공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 버지니아 울프의 책 『자기만의 방』. 이를 모티브로 한국의 20세기를 보여주는 여성들의 방을 재현한 강애란 작가의 개인전 ‘자기만의 방’이 지난달 14일부터 이번달 27일(일)까지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의 중심 작품 ‘지혜의 타워링’을 둘러싼 5개의 방을 시계방향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한 이번 전시는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윤심덕의 방이 차례로 배치돼 있고 마지막엔 위안부 여성들의 방으로 마무리된다.

강애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서재’라고 할 수 있는 작품 ‘지혜의 타워링’을 통해 기존의 가치관을 깨는 그의 시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은 미래에 도래할 가치관의 집약체로, 그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책을 LED로 재현해 가판대처럼 전시한 작품이다. 전시된 책은 주로 새 시대의 가치관을 보여주거나 구시대의 가치관으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한 켠에 놓인 ‘마담 보바리’와 ‘안나 카레리나’는 금기시 돼왔던 여성의 불륜을 다룬 작품으로, 여성들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구시대의 가치관에 의문을 던진다. ‘네오 익스프레셔니즘’ ‘archit’과 같이 기존 예술의 틀을 파괴하는 사조를 담은 작품들 역시 서재를 메우고 있어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대해 김수림 도슨트는 “화려하게 빛나는 오브제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담은 책을 읽을 때 느꼈던 황홀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혜의 타워링’을 둘러싸고 차례로 배치된 4개의 방에는 당시의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커리어를 일궈낸 여성들의 공간이 재현돼있다. 방들의 주인인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윤심덕은 모두 당대의 예술계에 한 획을 그었지만,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탕녀로 낙인찍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여성들이다. 강 작가는 이들의 방에 들어선 관객을 단지 손님으로만 두지 않는다. 그중 김일엽의 방에 들어가면 관객은 책상의 앞면이 아닌 책상 밑 서랍과 의자가 보이는 ‘방 주인’의 위치에 놓인다. 책상 위에는 타자기가 놓여있고 타자기는 계속 소리를 내며 ‘정조는 사랑하는 동안에만 지키면 되는 것’이라는 그의 정조관을 담은 ‘나의 정조관’을 써내려간다. 이처럼 당시로선 파격적인 목소리를 냈던 탓에 힘든 삶을 살아온 여성들의 방에 들어감으로써 시대에 앞서나간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마지막 모퉁이의 어두운 방은 위안부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다. 주황색 조명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다른 방들과 확연히 다르게, 이곳에서는 어둡고 텅 빈 공간에서 영상이 재생된다. 바닥에는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위안부’나 ‘subhuman treatment’(인간 이하의 대접)와 같은 단어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동시에 한쪽 벽면에는 위안부 여성들의 인터뷰 영상과 일본을 상대로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 영상들이 반복해서 재생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전쟁이 주는 아픔과 성폭력 피해자로서 겪는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고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강인함을 볼 수 있다. 또 위안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이 같이 참여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비쳐줘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시 관심을 가져야 할 역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김 도슨트는 “강 작가는 전시를 통해 사회가 점점 발전해 기존의 성 가치관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윤리와 도덕, 그리고 철학을 받아들이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여성을 억압하는 과거의 사상으로부터 고통 받았던 피해자들을 재조명하는 이번 전시에서 강 작가는 따스한 시선으로 이들을 감싸 안는다. 그의 전시는 여성들에게 조신함과 정숙함을 요구하는 사회적 억압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소소한 위로가 아닐까.

사진: 정유진 기자 tukatuka1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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